귀농을 해서 농사를 시작한지 아직 이년도 되지 않은 경태가 조합 일에 그토록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게 놀라우면서 그래도 대학까지 나온 사람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준석은 해마다 허리가 휠 정도로 이자를 물면서도 어디나 다 그러려니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농협이 시중 은행보다도 높은 이자를 받고 있다는 경태의 말이 사실이라면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배당에도 문제가 있다니, 준석은 솔깃해서 귀를 기울였다. “배당을 많이 해주면 좋은 거 아닌가? 조합장두 늘 그 자랑이더만. 자기가 조합장 되고나서 계속 고배당을 한다고.” 병균도 곁에서 추임새처럼 거들었다. “사실 농민들 중에 출자를 많이 한 사람은 몇 사람 안 된다고. 내가 알기로는 억대가 넘는 돈을 출자금으로 넣어놓은 사람들이 몇 명이 있는데, 이 사
선조들은 홀수가 겹치는 날은 이름을 붙여 특별한 행사를 하거나 의미를 더하는 음식을 해 먹으면서 고단한 삶에서 활력을 찾으려 노력했다. 일 년 중 마지막으로 홀수가 겹치는 음력 9월 9일(올해는 10월 13일)은 중양절(重陽節)이라 불린다. 重陽節이란 한자에서도 엿볼 수 있지만 이 날은 양(陽)의 기운을 가지는 홀수가 겹치는 날이다. 중양절에 조상들은 높은 곳에 올라 단풍 구경을 하면서 시와 음식을 함께 나누는 중양놀이를 하였는데 재액을 피하고 장수를 기원하는 하나의 풍속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에도 ‘단풍이 들고 국화가 만발할 때 사람들이 놀고 즐기는 것이 봄에 꽃과 버들을 즐기는 것과 마찬가지이다.’고 하는 기록이 남아 있다. 중양절에 중양놀이를 산으로 가지 못한 사람들은 대신 집에서 가족들과
석주명이란 사람이 있었다. 세칭 나비박사로 불린다. 일제가 조선의 모든 것을 수탈해가려고 조선의 토지, 산물, 식생 하다못해 조선인의 성격까지 기초조사를 벌였다. 그중에 나비에 관련한 자료를 보고 석주명은 뭔가 잘못됐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는 교직생활을 하면서도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각지의 나비를 채집해 우리나라 나비의 근거를 정확하게 밝혀 놓았다. 248종의 나비를 분류하고 표본하여 개성송도중학교 박물관에 전시한 것을 우연히 발견한 미국학자에 의해 미국학술원 후원을 받아 이후 연구에 재정적 도움을 받기도 했다. 석주명을 떠올리는 것은 그가 훌륭한 학자라서가 아니다. 그가 세계30명밖에 안 되는 나비학회 회원이라서도 아니다. 바로 한글날이라서 그의 이름이 떠오른 것이다. 그는 조선의 나비를 분류하면서 기존의
그뿐 아니라 농협에 빚을 졌다가 경매로 땅을 날리고 고향을 뜬 경우는 꽤 여럿이었다. 언젠가 정부에서 유리온실 사업을 권장하면서 대규모로 융자를 해줄 때 혹해서 시작을 했던 이들이 대표적이었다. 우선 먹기엔 곶감이 달다고, 엄청난 초기 투자비용을 낮은 이자로 빌려주자 젊은 농민들이 뛰어들었다. 유기농으로 쌈 채소를 기른다, 어쩐다 했지만 값이 떨어지면 따는 품삯도 나오지 않는 상추 따위를 해서 수지타산이 맞을 리 없었다. 대체 어는 책상머리에서 나온 정책인지 몰라도 평당 수십만 원을 호가하는 시설비를 노린 업자들의 농간이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저리라는 것도 때맞추어서 잘 갚을 수 있을 때 말이지, 연체라도 하게 되면 곧장 몇 배의 이자로 부풀려지고 도무지 감당할 수 없게 되는 것이 빚이
문 걸고 몰래 먹는다는 아욱국. 얼마나 맛있으면 밥상을 차려준 조강지처까지도 쫓아내고 먹을까만 아욱국은 맛만 좋은 것이 아니라 몸에도 좋다하여 ‘아욱으로 국 끓여 삼 년을 먹으면 외짝 문으로는 들어가지 못한다.’는 속담도 있다. 국을 끓여 먹으면 장의 운동을 유연하게 하며 젖을 잘 나게 해주므로 산촌에서 미역을 구하지 못하면 아욱국을 끓여 산모에게 먹이기도 하였다. 한방에서는 동규채 혹은 파루초라 부르는데 1907년 7월 대한매일신보에는 아욱을 파루초로 부르게 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실려 있다. “아욱은 보양하는 나물이라 한 집에서 봄에 나물을 심는데 그 집 아씨가 좋다며 말하기를 다른 나물은 심지 말고 아욱만 심으라. 우리 서방님이 좋아하시는 나물이다. 종의 대답이
65세에 기초연금 받으면 인생 잘못 산 것이라고 말한 복지부 김용하 전 국민연금재정추계위원장의 망발로 노인들의 심기가 많이 불편할 것이다. 아니 노인들뿐 아니라 앞으로 기초연금을 받게 될 국민 모두가 벌레 씹은 꼴일게 틀림없다. 김용하 전 위원장(52)이 지난달 27일 오전 KBS 라디오에 출연, “나이가 들어서 65세가 돼 기초연금을 받게 된다면 인생을 잘못 사신 겁니다”라고 잘라 말했다고 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애초 모든 노인들에게 월 20만원씩을 지급하겠노라 약속했다. 그 재원의 마련도 틀림없고 국민과의 약속은 지킨다고 했다. 아마 그래서 선거판에서 50대의 반란이라 표현된 박근혜 몰아주기가 가능했을 것이다. 박근혜 당시 후보는 문재인 후보보다 50대에게 190만표나 더 받았다. 우리
“솔직히 난 봐도 잘 모르겠으니까, 자네가 설명을 좀 해봐.” 준석은 경태가 보여준 손익계산서 페이지를 눈으로 당기며 손등으로 눈가를 비볐다. 부쩍 눈이 나빠져 작은 글씨는 잘 보이지 않았다. “우선, 쉽게 말씀을 드리자면, 손익계산서라는 게 한 마디로 전체 수입 내역과 지출 내역을 보여주고 손해가 났는지 이익이 났는지를 보여주는 거란 말이지요. 보면, 산동면 농협이 작년에 총 백오십 억 정도 수익이 나고 비용은 백삼십 억이 좀 넘지요. 그러니까 한 이십 억 정도가 이익이 났다는 거지요. 그런데 그 이익 중에 십오억이 한 군데, 그러니까 대출금 이자에서 나왔어요. 예치금 이자 오억까지 보태면 이자 수익만 이십억인데요, 물론 그 중에 예수금 이자로 십억이 나갔으니까, 절반 정도가 순수익이라고 볼 수 있어요.”
자색고구마는 맛이 없다. 호박고구마나 밤고구마를 생각하고 먹는다면 정말 실망스럽기 짝이 없을 것이다.보라색 물은 줄줄 흘러 손을 물들이고 입 주변까지도 물들이지만 정작 입안에서 느끼는 식감은 서걱거리기도 하고 덜 익은 무를 씹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푹 삶으면 부드럽기는 하나 물렁거리면서 여전히 계속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그런 까닭에 자색고구마들은 대부분 가루로 가공되어 색을 내야 하는 음식에 사용되는 것이 고작이다. 나의 이런 편견은 2년 전 음성으로 귀농한 한 농부를 통해 깨졌다. SNS를 통해 알게 된 농부로 나는 그 농부에게서 건강하게 농사지은 자잘한 농산물들을 구입해 먹어왔다. 어느 날 그가 보내온 고구마들 중에 자색고구마가 들어 있었고 호박고구마와 밤고구마의 중간 맛으로 그냥 삶아
2004년 쌀 재협상에서 우리 정부는 해마다 2만 톤씩의 의무수입(MMA)쌀을 추가 수입하기로 결정하고 쌀 개방여부를 10년 뒤로 미뤘다. 그리고 다시 10년이 가까이오자 이젠 자동관세화라고 농민들에게 말했다. “논의할 것도 없이 협정문에 10년 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언급이 없는데도 그렇게 되나요” 하고 농민들이 물으면 예의 자동관세화론을 말했다. 그런데 이렇게 관계자들이 떠벌린 데에는 이유가 있다. 바로 점화효과를 노린 것이다. 물론 지금은 재협상을 해야 한다는데 이견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다만 여기서도 관세화 개방이냐 아니면 의무수입물량을 확대하며 유예를 할 것이냐 두 가지의 안 만을 제시하고 있다.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는 것인데 지금 들여오는 의무수입물량만도 처리가 곤란하니 완전개방으
들 녘 제1장 마을 “근데, 형님. 이 손익계산서라는 거 보고 제가 참 놀랬어요.” 한동안 말이 없던 경태가 소식지 한 쪽을 펼치며 준석에게 내밀었다. 글씨가 작아 잘 보이지도 않았지만 보아도 무슨 말인지 모를 내용이었다. 농협에서 대의원 총회를 할 때 대의원들에게 나누어 주며 설명을 할 때도 그저 건성으로 들여다 볼뿐 내용을 뜯어볼 재주가 없었다. 우선 쓰여 있는 말들이 어려웠다. 대출채권 평가이익이니, 대손상각비니 하는 다른 나라 말들부터 이해가 안 되었지만, 그렇다고 일일이 물어보았다가는 농협 일에 딴지나 거는 별종쯤으로 치부되는 분위기였다. 실제로 총회에서 재무상태표와 손익계산서 내용을 두고 꼼꼼하게 따지던 봉곡마을 대의원 하나는 그예 대의원을 그만두었다. 외지에서 들어와 준석과는 별로
모처럼 시간을 내어 동네 어르신들과 차를 한 잔 마시면서 옛날에 추석 지낸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뒷집 할머니도, 이장네 어머니도 모두 여기서 계속 살 생각이 없이 담배 농사를 몇 년 지어 돈 많이 벌면 멀리 남원 시내로 나가 살려고 했었다 하신다. 그리고 저기 저 건너 낙엽송 심어진 곳이 옛날에는 모두 담배밭이고 감자밭이었다고 알려주신다. 그곳은 밭이 있었을 것 같지 않고 보기엔 그냥 깎아지른 듯한 산이다. 추석 음식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그 옛날 어렵게 살던 때를 떠올리게 되어 죄송하기도 하였다. 내가 중학교를 다니던 때로 기억한다. 허례허식을 없애야 한다면서 정부에서는 민초들의 관혼상제에 관한 기준을 정하여 가정의례준칙이라는 이름으로 발표를 하였다. 그리고 그 내용에 대해 학교에서는 가끔 시
삼일 먼저 2004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그해 12월31일 그동안 미뤄왔던 쌀 수입전면개방을 다시 10년간 유예하기로 정부가 결정했다. 물론 해마다 의무수입물량을 2만톤씩 더해서 돌아오는 2014년에는 40만8천톤에 이르도록 말이다. 농민들과 일부학자들은 당시 의무수입물량 20만톤에서 고정하고 협상해야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다시 돌아와 2013년, 내년으로 다가온 쌀 협상에 정부가 농민들을 속이고 있다. 아니 죽이려하고 있다. 쌀 전면개방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농민들은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다. “뭐 이제 끝난거구만”이라는 반응도 보인다. 내용을 잘 알지 못하는 농민들의 속내는 분노와 함께 체념이 섞여 혼란스럽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조합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로 시작하는 인사말을 흘낏 넘겨보다가 준석은 헛웃음을 쳤다. 아무리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게 사랑한다는 말이었다. 게다가 조합원 태반이 저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인데, 그런 인사가 합당한지 준석의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이엠에프 때 대통령이 된 이가 연설할 때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이라고 할 때도 퍽이나 이상하게 들렸다. 사랑이란 말은 진짜 그런 말을 할 만큼 가깝거나 친밀한 사람에게 쓰는 말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어쩌다 걸려오는 전화에서도 툭하면 사랑합니다, 고객님 운운하여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유들유들한 이상태의 얼굴이 겹쳐서 인사말 첫머리를 보고는 그 뒤는 읽을 마음도 일지 않았다. 조합장을 직선으로 뽑
돼지고기는 꼭 잘 익혀서 먹어야 한다고 들었다. 대학을 다니던 어느 날 친구들과 의정부 어느 쯤에서 제육볶음을 먹고 귀가해 자다가 병원 응급실에 실려 간 적이 있었다. 고추장에 버무려져 조리된 그 고기가 덜 익은 것이었는지 아니면 세균탓이었는지 잘 모르지만 그날의 고통만은 잊지 못한다. 그 뒤로 나는 삼겹살은 과자처럼 바삭하고 노랗게 구워질 때 까지 기다려서 먹고 고추장 양념으로 버무린 돼지불고기도 혹시 익지 않으면 어쩌나 하여 늘 조바심치면서 오래 불에서 익혀 상에 올렸다. 돼지를 키우던 환경을 기억한다. 어린 시절 내 모든 추억의 근원지였던 외가 뿐 아니라 돼지를 키우며 살던 그 어떤 누구의 돼지우리도 거기서 거기였다. 먹다 남은 음식이 모아져 가는 곳, 10m전방에서도 알 수 있는 돼지우리의 냄새, 돼
고구마는 어지간해선 꽃을 피우지 않는다. 그런데 고구마가 꽃을 피웠다. 그것도 넝쿨이 아주 실한 상태에서 메꽃 같은 나팔을 여럿 매달고 있다. 언뜻 생각은 50년 전으로 달려간다. 60년대 삼남은 물론 전국적으로 가뭄이 들었던 어느 해 모를 내지 못해 호미로 논바닥을 긁으며 모를 낸 해가 있었다. 그때는 분식과 혼식이 강요될 만큼 식량사정이 좋지 않던 시절이었다. 가뭄은 식량기근으로 이어지고 굶주림을 몸소 체험한 세대들은 걱정이 태산과 같았다. 가족이 주리기라도 하면 그것은 죽음과도 연결된 것이기에 모두가 근신하고 둠벙에서 물을 퍼 나르는 등의 노력으로 농사를 지었다. 고구마도 그렇게 심었다. 꾹꾹 눌러 심고 물을 퍼 날라 뿌리고 풀을 베어다 이랑을 덮었다. 그렇게 간신히 뿌리내린 고구마가 꽃을 피웠다. 아
고혈압식단을 부탁받고 고민한 적이 있다. 하루 세 끼 일주일 식단을 6개월간 짜야했는데 갑자기 한 사람의 음식을 전적으로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나로서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염분을 제한하거나 칼로리를 낮추고 육류의 섭취도 줄여야 하는 등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많지만 나는 내 나름대로 먼저 식단을 짜는 원칙을 세웠는데 그 중 제일로 꼽은 것이 제철에 나는 식재료를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음으로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그 식단을 지키며 음식을 먹을 사람이 사는 곳으로부터 가능하면 가까운 곳의 식재료를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생각이 거기에 머물자 제일 먼저 떠오르는 식재료가 사과였다. 고혈압식단이 필요한 지인은 장수에 살고 있었고 고혈압에 먹어도 되는 대표적인 과일이 사과이기
아들만 삼형제를 두고 그 입들을 먹여 살리느라 밤낮없이 일에 매달린 덕에 정덕봉은 이내 행랑살이를 끝내고 목구멍에 풀칠할 정도의 전답을 장만할 수 있었다. 그리고 큰 아들 승태가 대학교에 들어갈 무렵에는 마을에서 칠천 평 정도를 소유한 손꼽히는 땅 부자가 되었다. 더구나 세 아들 모두 까막눈 부모에게서 나온 자식답지 않게 공부에 힘을 쓰더니 척척 대학까지 붙어주었다. 당시만 해도 시골에서 세 아들을 모두 대학교까지 보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덕분에 논 몇 마지기가 상아탑 아닌 우골탑으로 들어갔어도 만나는 사람마다 건네는 축하 겸 인사를 받는 맛에 정덕봉의 어깨에 힘이 들어가던 시절이었다. 그 무렵부터 정덕봉이 술을 입에 대기 시작했다. 원래 못 먹는 술이 아니었건만 제 주머니 돈 나가는 것
분별없는 개방농정으로 고추농사가 망하게 됐다. 고추가격하락이 농사지을 힘을 빼앗고 있는 것이다. 1982년도에는 고추 한 평을 심고 그 고추값으로 한 평의 땅을 산다고 할 만큼 고추는 환금성 작목이었다. 그 후 수입산 연초로 담배농사가 어려워지자 담배농사 대신 고추농사로 몰려 고추값이 폭락했다. 농민들은 “노태우 고추 잘라버리자”며 조직적으로 고추투쟁을 시작했다. 개방농정으로 농민들의 설자리가 흔들리기 시작하자 조직적 저항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소몰이 투쟁과 고추싸움 두 가지가 본격적 농민투쟁의 상징일 것이다. 고추는 임진왜란 때 왜군이 조선사람들 먹고 죽으라고 가져와 심었다는 속설이 있을 만큼 임진왜란 이후 급속하게 퍼져나간 것으로 본다. 근거는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왜겨자’ 또는 ‘남만초
춘천에서 초등학교를 입학했지만 군인이라는 아버지의 직업 때문에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서울로 전학을 했다. 서울과 첫 인연을 맺은 곳은 정릉의 청수장 부근이었고 나는 어머니를 따라 아주 가끔 미아리고개를 넘어 돈암동으로 나들이를 했다. 그때는 한 달에 한 번씩 하는 계라는 경제활동(?)을 통해 저축을 하던 때였고 그때마다 큰 음식점에 모여 평소에는 먹지 못하던 음식으로 점심을 먹었다. 내 나이 열 살, 그때 그곳에서 처음 먹어본 소고기로 요리한 불고기의 맛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리고 한 동안은 우리 모두에게 최고의 외식메뉴는 바로 그 불고기였는데 요즘은 서울엘 가도 그런 불고기를 파는 음식점을 찾아보기 힘들다. 음식으로 풀어낸 서울의 삶과 기억이라는 부제를 달고 따비출판사를 통해 나온
논에 우렁이를 넣는다, 오리를 키운다 하며 친환경 벼농사를 시작했던 사람들 중에 벌써 반 가까이 그만둔 것을 준석은 알고 있었다.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던 탓에 이미 편하게 논농사를 짓던 일에 익숙해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 다시 관행농법으로 돌아간 것이었다. 개울가에 붙은 병균네 논은 더 한심했다. 집안이 그렇게 되다보니 늘어나는 건 날마다 비우는 소주병이었고 아직 젊은 나이에 알코올 중독에 빠져버렸다. 농사는커녕 다니는 환경미화원 일도 아슬아슬했다. 보통 새벽 세 시에 나가서 열시가 좀 넘으면 일을 마치는데 그 사이에 이미 소주 몇 병을 비워 집에 돌아올 때에는 혀가 꼬부라져 있었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 오랜 정으로 감싸주지 않으면 직장에서 잘리고도 남을 판이었다. 허긴 일반 직장이 아니라 잘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