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말 혹은 70년대 초, 독일 서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州)의 뒤셀도르프 시립병원 안에 있는 기숙사에는 1966년에 파견된 63명의 한국인 간호사들이 기거하고 있었다.어느 주말 오후, 마침 퇴근 시간이라 근무를 마친 간호사들이 하나 둘 기숙사로 돌아오고 있었는데, 그들보다 먼저 삼삼오오 몰려와서 기숙사 입구를 지키고 있는 남자들이 있었다. 인근 광산에서 일하는 한국인 노동자들이었다.간호사들의 퇴근행렬이 기숙사 앞에 이르자, 어슬렁거리던 광부 사내들의 움직임이 제법 기민하고 용감해진다. 뭐, 그래봐야 그들의 프러포즈는
1973년 1월 29일에 김포공항을 이륙한 김원우 씨(당시 30세) 일행은 장시간의 비행 끝에 드디어 쾰른의 본 공항에 착륙하여, 다음 날인 30일 저녁에야 독일 중서부의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에 있는 한 탄광촌 기숙사에 도착했다. 함께 비행기를 탔던 전체 인원은 100명이었으나 절반은 다른 지역으로 가고, 나머지 50명이 그곳에 배치된 것이다. 전남 강진 출신의 김원우는 같은 또래의 박완채, 조계석과 기숙사의 같은 방을 배정받았다. 그 둘은 모두 우리나라 서남부지역의 유일한 탄광인 화순광업소 출신이었다. 바로 옆방에는 강원도 팀이
1970년대 초에 서독에 건너가 베를린시립병원에 배속되었던 김순복 씨는 당시 자신이 받았던 첫 월급이 700마르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국에서 받던 급여에 비하면 파격적으로 높은 액수였다. 그러나 그것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이 아니었다.“한국에서 출국하기 전에, 외화획득을 위해서 의무적으로 외환은행에 3년짜리 정기적금을 들게 했어요. 누구나 다요. 간호사 취업 계약기간이 3년이었거든요. 저는 그중에서 600마르크를 몽땅 적금으로 부치고 100마르크만 가지고 살았어요. 생활하기에 매우 빠듯했지요.”하지만 워낙 바빠서 얼마 안 된
“처음 병원에 가서 우리가 수행해야 할 일과를 설명 들었을 때 깜짝 놀랐어요. 우린 분명 간호사로 갔는데 거기서 하는 일은 우리가 한국의 병원에서 하던 일하고는 영 딴판이었거든요. 아, 잘 못 왔구나….”육칠십 년대에 서독에 갔던 간호사들은 이구동성으로, 간호사의 역할에 대한 양국의 인식 차이 때문에 몹시 당황했었다고 토로한다. 처음 베를린시립병원의 여자 당뇨환자 병실에 배치되었던 김순복 씨의 경험담을 들어보자.“거동이 어려운 중환자의 수발을 간호사가 다 하게 돼 있었어요. 소변 기저귀도 갈아 채우고 가래도 받아내고…특히 당뇨환자는
1948년생인 김순복 씨가 150명으로 구성된 파독 간호사 팀의 일원으로 김포공항을 떠나 서독으로 향했던 때는, 1970년 5월이었다. 4년 전에 떠났던 하영순 씨와는 달리, 김씨는 한국과 서독 사이에 체결된 국가 간의 협정에 따라 출국한 케이스였기 때문에, 해외개발공사의 주선으로 출국절차를 밟았다.양쪽 모두 서독으로의 간호인력 수출이라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었으나, 독일 민간인의 주선으로 갔던 하영순 씨가 3년 동안 월급에서 항공료를 분할 공제했던 데 비해서, 김순복 씨는 국가에서 제공한 여객기를 타고 갔기 때문에 항공료를 부담
2008년에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의 보고서에 의하면, 독일정부의 정책변경으로 간호인력 파견이 중단된 1976년까지, 한국의 간호사 1만1,057명이 독일로 이주한 것으로 집계돼 있다.그러나 간호(조무)사들이 언제 처음 독일에 파견되었으며, 연도별로 그 인원은 어느 규모였는지를 정확하게 짚어 내기란 쉽지 않다. 한독(韓獨) 양국이 공적인 협정을 바탕으로 간호 인력의 집단취업을 추진하기 시작한 때는 1969년 8월이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독일 마인츠 대학의 의사였던 이수길 박사의 주선으로 한국의 간호사 128명이 독일 땅을
여기서 고국까지 몇 만 리던가 / 고향산천이 사무치게 그리울수록 / 편지를 기다리며 애를 태우네 / 부모와 처자들이 눈에 밟힐수록 / 아득히 멀어만 가는 조국, 조국… / 돌아가야지 / 아켄에서 가스를 먹고 잠든 / 경상도 친구도 잠을 깨어라 / 사나운 폭풍이 앞을 막아도 / 우리는 기어이 돌아가야 한다… 글속에 담긴 지은이의 절절한 마음만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이보다 더 훌륭한 시도 드물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징용 끌려갔던 조선 사람이 쓴 시가 아니다. 1960년대에 서독으로 돈벌이를 떠났던 광산 노동자가 고국을 그리워하면서 쓴
봉황리 선착장, 옹깃배의 선원들이 출항 준비로 복작거린다. 크고 작은 옹기들이 선창으로 끌려나와 줄지어 섰다. 선적 작업을 하는 선주와 선원들의 움직임이 부산하다.-안 깨지게 조심조심해서 실으라고! 큰 항아리부터 안쪽에다가 차근차근 실으랑께!-저 쪽 먼 바다에서 샛바람이 시게 불어싸는디…오늘 옹기 실고 나가도 괜찬할랑가?-옹깃배 하루 이틀 타봐? 문제없어. 돛 달아놓으면 뒷바람 타고 잘만 나가겄구먼.-다 실었으면 닻 올리고 출발하드라고! 아, 고사 지낼 도야지 머리하고 막걸리도 실어야제!드디어 물밑에서 닻이 올라오고, 옹깃배가 서서
가마에 옹기를 넣어서 배치했으면 이제 불을 때서 굽는 일이 남았는데, 옹기 가마에 불을 전문적으로 때주던 기술자가 따로 있었다. 처음에 약한 불을 지필 때에는 옹기공장 주인이 아궁이를 담당해도 되지만, 막판에 온도가 1,000℃ 가까이 올라갈 즈음에는 전문적인 기술자가 온도 조절을 해야 한다. 옹기장이 정윤석 씨의 설명을 들어보자.“옹기를 성형해서 바깥에서 일차적으로 건조시켰다 해도, 여전히 일정부분 수분을 함유하고 있거든요. 옹기를 가마 안에다 쟁여놓고 불을 때면, 가마 내부의 열기로 인하여, 옹기의 수분이 미세한 구멍을 통하여
기술자들에 의해 물레에서 모양이 완성되어 나온 옹기는 그늘에 두어 건조해야 한다. 그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작업 속도를 빨리 하기 위해서 햇볕에다 내어 말리기도 했다. 그늘에서 말리면 48시간이 넘게 걸리지만 햇볕에서는 대여섯 시간 만에 말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옹기가 햇볕을 고루 받도록 방향을 바꿔주거나, 너무 강한 햇볕을 받아 금이 가는 일이 없도록 볏짚이나 가마니로 덮어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기술자 두 사람은 물렛간에서 성형작업을 마치고는 곧장 퇴근해버렸으므로, 그 뒤의 공정은 신참 기술
“견습생이 처음으로 물렛간에 들어가서 시험 삼아 만들어보는 옹기가 바로, 물 두 되 들이 꼬마 항아리인 오가리라 그랬잖아요. 그걸 처음으로 모양 갖춰서 완성하는 순간, 막 흥분이 되고 자신감이 생겨요. 어, 이게 정말 되네? 신기하지요. 금방 기술자가 다 된 기분이거든요. 그런데 진짜 기술자들이 쓰윽 한 번 살펴보고는, 이걸 옹기라고 만들었느냐고 견습생 머리에다 팍 짓눌러서 ‘오가리 감투’를 씌워버리잖아요. 그래놓고 자기들끼리 막 깔깔대며 웃어요. 물론 악의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지요. 자기들도 그 과정을 다 거쳤으니까. 나도 첫날
열예닐곱 살 무렵에, 삼촌네 옹기공장에 견습공으로 들어갔던 정윤석이 담당했던 허드렛일들 중에는, 옹기를 만들기 위해 공장으로 반입하여 쌓아놓은 흙더미(점토)를 관리하는 일도 빼놓을 수 없었다. 당시만 해도 비닐이 없던 시절이라, 공장에 쌓아놓은 점토를 가마니 등속으로 덮어놓고는, 수시로 물을 떠다 뿌려서 습기를 유지해줘야 했다.흙 속의 불순물을 골라내기 위해 양쪽에 손잡이가 달린 쇠붙이로 흙더미의 흙을 일일이 깎아내는 ‘깎기 작업’을 하고, 그렇게 깎아낸 흙을 뭉쳐서 뚝메라고 불리는 나무 메로 쳐서 다지고, 납작하게 다져진 그 흙
1957년 무렵, 전남 강진군 칠량면 봉황마을의 옹기공장에서 옹기 만드는 작업이 한창이다. 이 마을엔 옹기공장이 무려 스물다섯 군데나 있었다. 그 많은 공장들이 한 마을에 모여 있었다면 가히 공단(工團) 규모가 아닌가 하겠지만, 한 공장에 종사하는 직공이 겨우 서너 명에 불과했으니…말하자면 가내수공업 수준이었다. 그럼 작업현장으로 가보자.-윤석아, 이거 메질 조깐 다시 해야겄다. 메 좀 갖고 오너라.-예, 기술자님, 메 여그 갖고 왔습니다이.-어이 윤석이! 나 여그 항아리 하나 다 맹글었응께, 저 짝으로 조깐 들어다 놓드라고. 찌그
옹기를 만드는 공정에서 가장 우선적이고도 중요한 사항은 당연히 옹기의 재료가 되는, 질 좋은 점토를 확보하는 일이다. 봉황마을이 옹기 굽는 마을로 이름을 날릴 수 있었던 일차적인 배경은, 질 좋은 점토가 주변에서 지천으로 생산되었기 때문이다.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옹기 공장의 주인이 설령 자기 소유의 논이나 밭이라 해도, 그 속에 묻힌 점토를 제 마음대로 파다 써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광업권(鑛業權)이라는 말이 나온다. 광업법(鑛業法)에 의하면, 토지의 소유와는 별개로 땅속에 묻힌 광물은 원천적으로 국가에서 관리한다. 철
지붕 위에서는 두어 통, 박이 익어간다. 닭들은 모이를 찾아 마당을 종종거리고, 토방마루 한 쪽 절구통 옆에서 강아지가 졸고 있다. 초가집 기둥과 마당가의 감나무 가지를 연결한 나일론 줄에 빨래가 널려 있다면야 좋겠지만, 이미 걷어낸 뒤라면, 대신 참새 몇 마리가 조르라니 앉아서 재잘거린다 해도 어색할 것은 없다. 초가집과 조금 떨어진 곳에 변소가 있고, 변소와 나란하게 붙어 있는 외양간에서는 누렁소가 마당 쪽으로 머리를 내밀고서 게으른 입놀림으로 되새김질을 한다. 아, 싸리 울타리에 드문드문 나팔꽃이 피어 있다면 금상첨화겠다.자,
경로당의 할머니들에게서 시집살이 얘기를 듣는 동안 내내 뇌리를 떠나지 않았던 의문점은 당연히 ‘시어머니는 왜?’였다. 시어머니는 그 자신이 모진 시집살이를 겪었고, 자신의 딸들이 또한 누군가의 며느리가 되어서 같은 처지에 놓일 터인데…그런데 대체 무엇 때문에 아들의 배우자에게, 요즘으로 치면 가히 ‘범죄적 수준’이라 할 그런 가해를 자행했던 것일까?할머니들은 당신들이 부당하게 당하고 겪었던 시집살이의 억울함과 설움을 절절히 토로하면서도, “왜 그랬는지는 나도 몰라. 그땐 시어머니들이 그냥, 다들 그랬어”라고 얼버무렸다.또 한 가지의
참 곱다. 우리 집 마당가에도 해마다 여름이면 이 꽃이 핀다. 길쭉한 통 모양으로 늘어진 이 붉은 꽃은 끝부분이 위아래로 벌어졌는데, 얼핏 보면 입술연지를 바른 여인이 입을 벌리고 화사하게 웃는 모양이다. 더구나 아랫입술에 해당하는 곳에 두 개의 하얀 이(치아)도 나 있어서 요염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 꽃의 이름을 알고 나면 ‘화사’니 ‘요염’이니 하는 상상은 턱없는 사치임을 깨닫는다. ‘며느리밥풀꽃’이다. 그렇게 보면 아랫입술 위에 난 두 개의 하얀 그것은 이가 아니라 밥풀이 된다. 그 꽃에 얽힌 전설이 마음을 더욱 불편하게 한
“첫 임신을 하잖아요. 그러면 졸음이 시도 때도 없이 쏟아져요. 비가 오는 날이면 더하지요. 방안에서 바느질을 하며 졸다가 손가락을 찔려서 피가 나도, 눈꺼풀이 천 근 만 근 내려앉는 걸 어떡해요. 그래서 밖에서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조용하면 잠깐 드러누워 눈을 붙였다가도, 시어머니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싶으면 후다닥 일어나지요. 들키면 지청구 들으니까.”이북에서 피란 나왔다가 강원도 홍천의 산간마을로 시집을 갔던 엄금희 할머니가 들려준 얘기다. ‘졸음이 호랑이보다 무섭더라’는 그의 회고담 역시, 그 시절 다른 며느리들의 경험과 크
충주 변두리 아파트의 경로당에서 만난 노인들 중, 경상북도 김천 출신의 육명순 할머니(1928년생)도 18살 되던 해에 고향 인근 마을로 시집을 갔다고 했다. 이 할머니 역시 시집살이 중에서 가장 몸 고생을 했던 일은, 뭐니 뭐니 해도 식구들의 빨래였다고 회고한다.“그 때 경상도 우리 사는 데서는 점심때면 늘 김치하고 콩나물을 넣고 ‘갱시기죽’을 끓여먹었어요. 여남은 명이나 되는 식구들의 점심을 차려내고, 그 많은 식구들의 옷을 빠는 일을 나 혼자 감당했거든요. 솥단지 하나에는 죽을 끓이고, 또 한 솥단지에는 잿물을 넣고 빨래를 삶
옛 시절 군대 다녀온 사람들이 ‘졸병’ 시절을 돌이킬 때면 혹독한 ‘기합(얼차려)’보다, 살을 에는 추위보다, 그리고 배고픔이나 고된 훈련보다…시도 때도 없이 밀려드는 ‘졸음’을 제일로 참기 힘들더라고 토로한다. 그런데 신기한 것이 이등병에서 일등병을 지나 상병쯤이 되면 그 ‘닭병(꾸벅꾸벅 조는 병)’이 감쪽같이 사라지더라는 것이다. 내가 충주의 한 아파트단지 경로당에서 만난 할머니들 역시 “시집살이 초년시절에 가장 참기 힘든 것이 졸음이었다”라고 입을 모으는 걸 보니, 역시 옛 시절의 시집살이는 왕년의 군대생활과 빼닮았다.초저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