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은 어차피 놈의 집으로 갈 자식잉께, 글자를 갈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제, 글을 갈쳐서 시집 보내 놓으면 사네, 못 사네, 함시로 친정에 이렇게 저렇게 편지질이나 해싼다고….”이름 밝히기를 꺼리는 한 할머니 학생(73세)의 얘기다. 딸을 차별하는 가장 원시적인 근거로 삼았던 것이 이른바 ‘출가외인’이라는 인식이었다. 따라서 일단 시집을 가고 나면 철저히 그 집 식구가 돼야 하는데, 글자를 가르쳐서 보내면 쓸데없이 친정에 ‘편지질’이나 하면서 시집살이의 고충 따위를 이러저러 고자질이나 할 게 뻔하니…교육을 시킬 필요가 없다는 논리
2002년 5월 어느 날, 순창공공도서관의 여성한글학교에 40대 중반의 주부가 찾아왔다. 한글학교의 김만수 교장이 그를 맞는다. 여인이 대뜸 묻는다.-여그가 글자 모르는 사람들한테 한글 갈쳐주는 학교지라우?다른 데에서는 한글을 읽고 쓰지 못한다는 사실을 어떻게든 감추려고 요모조모 별별 궁리를 다 하다가도, 여기 오면 누구든 일단 그런 부끄러움이며 조바심 따위 훌훌 벗어던진다. 그러라고 만든 학교다. 그런데 사는 곳을 물어본 김 교장이 고개를 갸웃하며 여인에게 묻는다.-유등면 무수리라면, 강을 건너서도 한참 멀리 가야 나오는 동넨데…
2002년 초여름의 어느 날 저녁,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공공도서관 3층에 마련된 널찍한 방에서는, 세미나도 아니고 토론회도 아니고 그렇다고 일반 학교의 수업하고도 다른 매우 진지한 행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통로를 비집고 다니기가 불편할 정도로 빽빽하게 들어찬 책상에는 80여 명의 나이든 여성들이 앉아서 연필에 침을 묻혀가며 뭔가를 열심히 ‘그리고’ 있다.“부를 테니까 받아서 적으세요. 가-마-니. 받침이 없는 쉬운 글자니까 다들 쓸 수 있을 거예요. 나락 담고 보리쌀 담는 가마니 모르는 분은 없지요. 다 썼어요?”나이든 ‘여학생’들
1970년 봄의 어느 주말, 개심저수지가 있는 충북 옥천군 이원면 장화리에는 저수지가 생긴 이래 가장 많은 외지 사람들이 몰려와서 복작거렸다. 그들 중 한 남자가 확성기를 켜 들었다.-아, 아, 전국 낚시대회에 참가하신 회원 여러분께 알려드립니다. 정각 10시에 대회를 시작하겠습니다. 거기 부산팀하고 서울팀 선수들, 각자 제 위치로 가서 앉아 주세요!장화리 주민들이 보기에 그들이 하겠다는 ‘낚시대회’라는 것은 참말 요상스런 행사였다.-아니, 세상에 낚시질을…뭔 놈의 운동경기맨치로 시합을 다 하는 모냥이여, 허허, 차암.-글씨 말이여
19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에 걸친 그 시기에는 유난히 가뭄이 심했다. 농민들은 거북등처럼 갈라진 논바닥을 바라보며 그저 한숨만 내쉬고 있었는데, 정부에서 궁리 끝에 나름의 대책을 내놓았다. 수리시설이 갖춰지지 않은 지역 주민들의 가뭄극복 대책으로, 들판 곳곳에 관정(管井)을 파도록 지원을 하겠다고 나섰다.당시의 관정은 거창하게 ‘수리시설’이라 부를 건덕지도 없이, 그냥 지름 일 미터 내외로 잘해야 오륙 미터를 파고 내려간 좁은 우물에 불과했다. 내부둘레는 일반 우물처럼 돌로 쌓아 올린 게 아니라 미리 콘크리트로 제작한 둥그런
겨울이 왔다. 아이들은 등하굣길에 제법 얼음이 얼기 시작한 저수지의 가장자리 쪽에다, 제 머리통만 한 돌을 낑낑대며 들어 올렸다가 힘껏 던져본다. 얼음이 깨지고 첨벙, 물보라가 튄다. 아직은 아니다. 아이들에게 저수지의 겨울은, 수면 전체가 꽁꽁 얼었을 때라야 비로소 시작이다.저수지가 얼면 그곳은 또 한 번 아이들의 놀이터가 된다. 기껏 허리춤 깊이의 물가에서 첨벙거리다 나오는 여름철의 놀이와는 견줄 바가 아니다. 아이들은 몇 밤이나 자면 그곳이 저희의 빙판 놀이터가 될 것인지를 나름으로 어림해본다. 그 전에 준비할 것이 있다. 썰
장화리 마을 뒤편에 있는 소류지(沼溜地) 즉 ‘작은 저수지’는 걸핏하면 바닥을 드러내곤 했지만, 규모가 큰 개심저수지는 여간해서는 마르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삼남(三南) 지역에 가뭄이 극심했던 60년대 말의 어느 해에는 그 크다는 개심저수지도 흙바닥을 드러내 보이고 말았다. 하지만 저수지를 관리하는 수리조합 측에서는 저장된 물을 모두 방류하지는 않고. 가운데 부분에 얼마쯤의 물을 남겨 두었다. 물고기를 살리기 위해서였다.어느 날 수리조합 사무실에서, 저수지 한가운데의 그 넓지 않은 물웅덩이를 두고 흥미로운 흥정이 벌어지고 있었다.
1960년대의 어느 봄날, 개심저수지 인근의 장화리에 사는 윤용병은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책보를 툇마루에 던져놓고는 헛간으로 내달아, 무엇인가 뒤지고 꺼내고 하느라 정신이 없다.-학교 댕게 왔으면 뒷산에 가서 풀이나 한 망태 비오거라. 씰 디 없는 해찰 부리지 말고.돼지 먹일 풀을 베어 오라는 말을 귓등으로 흘리고 대꾸가 없자, 어머니의 목소리가 커진다.-엄니 샘에 갔다 올 것잉께, 딴 디 가지 말고! 일하기 싫으면 밥도 묵지 말어야제.소년 윤용병은, 물동이를 이고 사립을 나가는 어머니의 등 뒤에 대고 이렇게 중얼거린다.-나는 일하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그걸 누가 모르랴만, 그러나 당연해 보이는 그 물리 혹은 자연법칙이 못내 원망스러운 사람들이 있었다. 저수지 위쪽에 농지를 둔 농민들이 그들이었다.봄부터 가뭄이 들었다. 하지만 충청북도 옥천의 개심저수지에는 아직 물이 넉넉했다. 저수지는 그럴 때 이용하라고 있는 시설인데, 저수지 바로 위쪽 장화리 마을 주민들은 갈라진 논바닥을 바라보며 한숨만 짓는다. 마을의 전답들이 저수지 수면보다 더 높은 곳에 자리한 탓에, 넘실대는 저수지를 턱밑에 두고도 목말라 해야 하는 것이 장화리 마을 주민들의 숙명이었다. 그
1954년의 어느 봄날, 충북 옥천군 이원면 장화리 바로 아래쪽에 자리하고 있던 평지말(평지마을)의 동각(洞閣) 마당에 아침부터 주민들이 모여있었다, 남정네들은 담벼락 아래 삼삼오오 쪼그려 앉아 한숨 섞인 담배 연기만 내뿜고 있었고, 여인네들도 수심 가득한 얼굴로 무슨 얘기인가를 두런거리고 있었는데…. 꽃피는 봄날이었지만, 분위기로 보아 경사스러운 일로 모인것이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이윽고 검은 양복 깃 위로 하얀 남방셔츠 깃을 펼쳐 덮은 차림새를 한 공무원이 등장하여 마을 사람들을 일별하더니, 연설인지 하소연인지를 늘어놓기 시작했
‘내 고향 가는 길 뜨거운 남도길 / 저편 둑 위로 기차는 가고…’김민기가 부른 ‘고향 가는 길’의 첫 대목이다. 모르긴 해도 옛 시절의 대중가요 중에서 남녀 간의 사랑을 빼놓으면 고향(향수)을 주제로 한 노래가 압도적으로 많을 것이다. 고향을 그리는 내용의 노래를 부르거나 감상할 때 사람들은 대체로 눈을 감는다.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에 고이 담긴 고향의 풍광은 제가끔 다르다. 이 노랫말의 주인공처럼, 강둑 철로 위로 기차가 지나가는 고향 마을에 다시 찾아가서, 소년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칡뿌리를 질겅질겅 씹어보고 싶은 염원을 간직
-역시 아파트가 좋구나! 연탄가스 걱정할 것 없고. 더운물로 집안에서 목욕도 할 수 있고….나에게 연탄 관련 얘기를 들려주던 박영숙 씨가 드디어 기나긴 셋방살이를 청산하고, 보일러 난방 시설을 갖춘 아파트에 입주했다. 아파트의 세대마다 보일러실이 따로 있어서, 거기서 연탄으로 데운 물을 파이프를 통해 각방으로 공급하는 방식이었다.연탄 아궁이가 보일러로 바뀌면서, 그동안 연탄불이 해오던 취사 기능은 자연스럽게 석유곤로가 담당하게 되었다. 장구한 세월 동안, 나무 땔감이나 연탄으로 구들장을 덥히는 방식으로 살아오다가, 더운물을 흘려보낼
일요일 아침, 주인집 할머니가 신혼부부가 세 들어 사는 방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린다.-새댁, 자요? 어째 대답이 없나? 새댁 아직 자는 거야?이번엔 좀 더 세게 두드린다. 그때에야 방안으로부터 졸음에 겨운 목소리 들려온다.-할머니, 오늘 출근 안 하거든요. 잠 좀 더 자려구요. 왜 무슨 일 있으세요?-그래그래, 알았어. 아, 일요일이구나, 그럼 더 자요.할머니가 물러간 뒤, 투덜거리는 ‘새댁’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지난 일요일에도 그러시더니…저 할머니는 일요일 아침마다 잠을 깨운단 말이야.“맞벌이 부부라 늘 잠이 모자랐거든요. 일요
1960년대와 70년대에 각각 한 차례씩의 ‘연탄 파동’이 있었다. 특히 제2차 파동(1973~74년)은 중동의 석유감산 정책에서 비롯된 이른바 ‘오일쇼크’를 전후하여 일어났는데, 도시 서민의 생계에 끼친 타격이 심각했다. 수원 ‘대성연탄’의 김용덕 사장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오일쇼크로 기름값이 오르니까 정부에서는 기름 대신에 연탄을 사용하도록 대대적으로 계몽을 했단 말예요. 그러자 가수요(假需要)가 더해져서 아예 여름철부터 전국적으로 연탄 사재기 소동이 일어난 거예요. 그러니 가난한 서민들은 연탄 구하기가 매우 어렵게 된 겁
단칸방에 세든 주부가 연탄불을 문제없이 잘 관리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면, 이미 살림살이에 대한 지혜의 반은 터득한 셈이다. 그 방면에 이력이 붙은 우리의 어머니들은 연탄의 연소상태를 잘 조절해서 아침 녘에 이르러 가장 강한 불길이 일게 했다. 그래야 때맞춰 아침밥을 지어서 출근하는 남편과 학교 가는 아이들에게 먹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야, 너 도시락 안 싸 왔어?-응. 아침에 연탄불이 꺼져서 못 싸 왔어. 대신에 엄마가 빵 사 먹으라고 돈 주셨거든.-와, 좋겠다. 내 밥 나눠 먹고 같이 사 먹으러 가자.점심시간에 밥을 굶고
1980년대 초, 젊은 부부가 단칸 셋방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신혼부부는 단칸방을 세 얻어서 첫 살림을 시작하는 것이 정해진 코스였다. 또한 첫 아이를 낳기 전까지는 맞벌이를 하는 것 또한 도회지 신혼부부의 일반적인 모습이었다.대체로 연탄불 관리하는 요령쯤은 이미 친정이나 본가에서 경험을 쌓은 뒤에 결혼을 하지만, 평소 집안 살림을 부모에게만 전적으로 의지했던 선남선녀가 덜컥 신혼살림을 차리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 경우 꽤 오랫동안 연탄 아궁이 앞에서 허둥대는 세월을 보내야 한다.퇴근길에 만나서 함께 집
기계화 설비가 전혀 갖춰지지 않았던 1960년대 초에는 연탄을 어떻게 만들었을까? 수원 ‘대성연탄’의 김용덕 사장의 증언을 바탕으로 살펴보면 이러하였다.강원도 탄광에서 석탄을 실은 화물열차가 수원역에 당도하면 연탄공장의 직공들이 줄지어 리어카를 끌고 화물 하치장으로 출동한다. 당시엔 포클레인 등의 장비가 없었기 때문에 인부들이 화차에 올라가서는 일일이 삽으로 석탄을 파 내려서 리어카에 실었다. 그렇게 운반된 석탄은 공장 한쪽의 저탄장에 쌓인다.저탄장에서 공장 안으로 석탄을 운반하는 도구도 역시 리어카였다. 그런데 석탄만 운반해서 될
“서울에 있던 연탄공장들이 모두 사라졌다고? 무슨 소리야? 강남 한복판에도 두 군데나 성업(盛業) 중인데. 압구정 연탄공장하고 신사동 연탄공장….”우스갯소리다. 하지만 실제로 압구정동과 신사동엔 그런 이름의 연탄공장이 있다. 나이가 어지간한 사람들에게 연탄공장은 검은 석탄이 산처럼 쌓여있고, 탄가루나 연탄을 운송하는 트럭들이 부단히 드나드는…그런 모습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서울 강남에서 성업 중이라는 그 ‘연탄공장’은 식당(포장마차) 이름이다. 돼지갈비를 연탄불에 구워 파는.물론 2001년도에 내가 찾아갔던 수원역 뒤편의 ‘대성연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연탄이 가장 많이 팔렸던 최대 성수기는 1986~87년도였다. 이 시기의 전국적인 연탄 수요는 2,400만톤이었다. 산업용은 제외하고 가정용만을 집계해서 그러하였다. 그런데 서기 2000년도의 가정용 연탄 소비량은 120만톤으로 줄었다. 기름보일러와 도시가스의 보급 확대로 13~14년 사이에 무려 95%가 감소한 것이다.내가 연탄 때던 시절의 얘기를 취재해보겠다고 나섰던 때가 2001년 9월 어느 날이었는데, 그땐 이미 ‘연탄의 시대’가 저만치 과거 속으로 물러난 뒤였다.-자, 모처럼 우리 집에 놀러 온
1960~70년대에 독일에 파견되었던 간호사와 광산노동자들이 애당초 약정한 근로계약 기간은 3년이었다. 하지만 계약이 만료됐다 해서 미련 없이 짐을 챙겨 귀국하겠다고 나선 사람은 드물었다. 어떻게든 체류 기간을 연장하려고 궁리를 했다.파독(派獨) 시기별로 독일당국의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정책이 조금씩 달라지기는 했지만, 광부들에게 엄격했던 것과는 달리 간호사들에 대해서는 일정 기간의 연장 신청을 받아주기도 했다. 1973년에 출국하여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州)의 한 광산에 투입됐던 김원우 씨의 얘기를 들어보자.“우리가 갔을 때는 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