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네 이참에 서울 갔다가 구경 잘하고 왔는가?-아먼. 우리 둘째 아들놈이 서울에서 큰 공장에 댕기는디 말여, 고놈 덕분에 창경원에 가서 호랭이도 보고, 징허게 큰 구렁이도 보고….-그라먼 남산에는 올라가 봤는가?-아, 서울 갔다가 남산 귀경 안 하고 왔겄어. 꼭대기까장 올라가서 그 뭣이냐, 팔각정에서 떠억 내려다 보니께, 와, 남대문이 아그들 장난감만하게 뵉이드랑께.-그라먼 케이블…그 머시기도 타봤어? 전깃줄 타고 공중으로 쭈욱 날아가는 버스 말이여.-그것은 못 타봤구먼.-나는 지지난해에 서울 가서 우리 딸내미랑 같이 타봤제, 허
서기 2002년 6월 초순의 어느 이른 아침, 서울특별시 중구 회현동 쪽의 남산공원 입구에 승용차 한 대가 달려와 멎더니 50대 후반의 한 남자가 차에서 내린다. 그가 서둘러 들어간 곳은 남산 식물원이다. 식물원에 들어간 그는 누군가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눈다.-어디 이 녀석들 밤새 잘 있었는지 문안 인사를 좀 받아볼까. 어이구, 이 녀석은 이파리에 주근깨가 생긴 걸 보니 영양 상태가 안 좋은 모양이로구나. 넌 또 왜 맥이 빠져 있는 것이야? 알았다, 알았어. 목이 마르다 이 말씀이지?식물원의 통로를 따라 여기저기를 옮겨 다니며 마
1960년대 중반에 군을 제대한 총각 박해수는, 한지 만드는 일을 보다 규모 있게 해 보겠다고 작심하고는, 집안에다 공장을 새로 차렸다. 닥나무 다발을 개울가로 가져가 쪄서 껍질을 벗기고…하는 방식으로는 작업도 힘들뿐더러 생산량도 한계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작업환경이 그렇게 열악해서는, 장가를 가는 데에 애로가 있었다.-집에서 종이를 만든다고예? 그거 엄청시리 힘들다카던데….-아입니더. 이번에 공장을 새로 차려서 완전히 신식으로 종이를 만듭니더. 그라고 작업은 인부들이 다 맡아서 하이깨네, 내한테 시집오면 고생시러운
아무리 가난한 집이라도 추석 명절을 앞두고는 방문의 창호지를 새로 발랐다.음력 7월의 어느 일요일, 아침밥을 먹고 나자 아버지는 이 방 저 방의 문짝들을 분리해서는 마당의 평상에다 걸쳐 놓았다. 큰방 작은방 할 것 없이 앞뒷문을 모두 문틀에서 뜯어낸 것이다. 방문은 늘 그 자리에 고정돼있는 것으로만 알고 있던 어린아이들에게는, 암수가 결합돼 있던 돌쩌귀를 훌쩍 벗겨내어 순식간에 문짝을 분리해버린 아버지의 동작은, 무슨 요술을 부린 것만 같았다.-퍼뜩 나와서 문종이 벗겨라!평소엔 창호지 문에 작은 구멍이라도 낼라치면 호된 지청구로 욱
서암리 주민들이 가내 수공업으로 만든 닥종이(한지)를 갖고 나가, 신반 오일장의 지전(紙廛)에 쌓아두고 판매를 할 때, 대량으로 구입을 해가는 주 고객은 각 지역의 지물포 주인들이었다. 지물포에서는 다시 소매상인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했는데, 그 소매상인들이 다름 아닌 종이 행상들이었다. 박해수씨의 얘기를 들어보자.“인구가 어지간히 많은 읍내나 면 소재지 정도 되는 곳이라면 지물포가 따로 있지만, 그보다 작은 마을의 경우엔 잡화점에서 창호지를 조금씩 갖춰놓고 팔았어요. 번듯한 잡화점도 없는 마을에는 종이 장사꾼들이 창호지 묶음을 짊어
의령군 서암리 주민들은 각기 ‘가내 수공업’ 방식으로 생산한 닥종이(한지)를, 어떤 방식으로 내다 팔아서 생계 수단으로 삼았을까? 무엇보다 닥나무 껍질을 벗겨서 매우 고단한 단계 단계를 거쳐 빚어낸 그 닥종이들은 시장에서는 어느 만큼의 가치로 거래가 되었을까?1950년대 말의 어느 날, 인근 오일장에 닥종이 팔러 가는 서암리 주민의 뒤를 따라가 보자.-최가야. 오늘 신반 장날인데 종이 팔러 안 갈끼가?-가야제. 벌써 지게에 종잇짐 다 꾸려 놨다 아이가.-최가 너그는 이번에 많이 했제? 얼마나 갖고 나가노?-이번 장에는 두 동 갖고
떡을 치듯이 한바탕 매질을 해서 부드럽게 만든 닥나무의 속껍질 반죽을, 다시 한번 물에 씻어서 잿물을 완전히 제거한다. 마지막으로 커다란 나무통에다 넣고 물을 부은 다음, 알맞은 묽기의 점액으로 만든다. 닥나무의 섬유 원료를 물에 풀어서 담는 이 나무통을 지통(紙筩)이라고 부른다. 이제 이 점액에서 바로 종이를 떠내면 되느냐고 묻자 박해수씨는 빠져서는 안 될 또 한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닥풀 점액이란다. 닥풀?“닥풀이라는 식물이 있어요. 밭에다 따로 재배를 하는데요, 그 뿌리를 물에 담갔다가 발로 자근자근 밟으면 코처럼 끈적한 점
마을 사람들이 냇가 공터에 설치된 거대한 아궁이 위에다 자갈을 깔고서 한참을 달군 다음, 각자가 자기 밭에서 짊어지고 온 닥나무 다발들을 그 위에 올린다. 그러고는 빙 둘러서서 삽으로 흙을 퍼 넘겨 닥나무 다발을 덮는다. 불 때던 아궁이도 공기가 통하지 않도록 봉쇄한다.그다음엔 자갈을 덮은 흙더미 여기저기에 구덩이를 피고는 거기다 물을 붓고, 그 구멍으로 김이 새지 못하도록 재빨리 흙으로 메워야 하는데, 그 작업은 순발력이 필요하다.-자, 구덩이 팠으면 퍼뜩 물 부어라!-뭐 하노! 물 부었으면 빨리 흙 떠서 구멍을 막으라카이! 그
1940년대 중반, 의령군 봉수면 수암리 중턱에서 나뭇짐을 지고 내려오던 두 남자가 만났다. 작대기로 지게를 받쳐 세운 두 사람이 땀을 닦고는 숨을 고른다,-내는 한 다발밖에 몬했는데, 박가 니는 어데서 그렇게 많이 했노?-아이고마, 나무 요놈 할라꼬 저 국사봉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아이가.-인자 마, 사람들이 이 언덕 저 골짜기 천지 사방 들쑤시고 댕기면서 다 훑어 삤으이, 이러다가는 아예 닥나무 씨가 마르겠다 아이가.해방 직후만 해도 이 마을 사람들은 이 산 저 산 돌아다니며 야생 닥나무를 해다가, 아주 소규모로 종이를 떠서는 5
경남 의령군 봉수면 서암리에서 3대째 한지 만드는 일을 해오고 있다는 박해수씨(1943년생)는, 취재차 마을을 찾아간 나와 마주 앉자마자 대뜸 “197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 마을주민 500여 세대 중에서 400세대가 넘게 닥을 가지고 먹고 살았어요”라고 했다. 얼핏 들으면 주민 대부분이 양계업에 종사했다는 것으로 오인할 만한데, 박해수씨가 말하는 ‘닥’은 ‘닭’이 아니라 뽕나뭇과에 속하는 키 작은 활엽교목 즉 ‘닥나무’를 일컫는다. 예부터 이 닥나무 껍질이 문종이(한지)의 기본 원료로 사용돼왔다. 달리 말하면 닥나무 껍질로 한지 만
-으읏, 추, 추워….-자, 자, 엄마가 한 겹 더 덮어줄 테니까, 이불 속으로 푸욱 들어와.-그래도 자꾸 찬바람이 들어온단 말이야.-그러니까 인석아, 방문 창호지를 찢어놓지 말았어야지. 사방에 구멍을 뚫어 놨으니….-내가 안 그랬어. 형아가 찢었어. 숨바꼭질할 때 어디 숨었는지 내다본다고 손가락으로.-안 되겠다. 엄마가 일어나서 수건으로 일단 바람구멍부터 막아놓고, 나중에 풀 쒀서 구멍 난 데 발라 때워야겠다. 아이고, 요놈의 부잡스런 사내 녀석들 때문에 바람 잘 날이 없으니.자리에서 일어난 어머니가 수건 한 장을 갖고 가서는,
3남 3녀 중 맏이로 태어났으나, 아버지의 주선으로 어렵게 들어간 국민학교에서마저 어머니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이내 중퇴하고 말았던 강원도 출신의 김용심 할머니.이 할머니가 소녀 적에 한글을 터득한 과정이 눈물겹다. 김용심의 어머니는 딸을 학교에 못 나가게 한 것은 둘째 치고라도, 아예 책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을 영 못 참아 했다.-얘야, 광에 가서 쌀 한 바가지 퍼 오너라!김용심이 어머니의 명을 받고 광으로 향하는데, 공교롭게도 바로 아래 남동생이 공부하고 있는 방을 거쳐서 가야 했다. 김용심은 쌀 바가지를 내려놓고는 주머니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