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대학병원과 상급종합병원 치과 그리고 치과의원에서 근무하면서 가장 많은 환자들이 원하는 것이 아픈 이를 빼지 않고 치료하는 것이었습니다.하지만, 이가 많이 흔들리거나 충치가 너무 심하게 이환되어 잇몸 속 뼈 부위까지 충치가 진행된 경우 자연 치아를 살리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함에도 불구하고 치아를 살리기 힘든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따라서, 치아상실의 원인이 되는 질환을 초기에 발견하고 이를 조기에 치료하여 자연치아를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치아를 가능한 보존해 주어야 하는 이유는 치아는 씹고, 말하고, 자신있게 웃게 해주는 다양한 기능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이러한 기능을 하는 치아 중 어금니가 빠지게 되면 음식물을 잘 씹지 못하게되고 인접한 치아가 기울어지거나 마주보고 있던 치아
“가자, 늬 배 고프지?” 몹시도 찬바람이 부는 저녁이었다.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불쑥하게 솟은 건물들이 새삼 낯설기만 했다. 마음속으로는 그깟 서울이 대수냐고 다짐을 하다가도 여기서 살 생각을 하면 아득해지는 기분이 되곤 했다. 가방을 바싹 당겨 안고 선택은 앞서 가는 신정호 씨를 바투 뒤따랐다. 마르고 큰 키의 신정호 씨를 무슨 호칭으로 불러야 할까, 잠시 고민이 되었다. 전에 불렀던 대로 아저씨라고 부르면 될까. “날씨 한 번 되우 춥다, 그지? 근데 잠깐만 여기서 기다렸다 가자. 집에도 다 왔다.” 한참을 걷다가 그가 멈춰선 곳은 꽤 큰 건물 앞이었다. 큰길가 모퉁이에 자리 잡은 건물 꼭대기에 세로로 ‘해태제과’라는 간판이 한 글자씩 걸려 있었다. “여기가 과자 맨드는
계속 미루던 영화를 보았다. 내용을 알고 보는 영화이고 사람의 감정을 극도로 자극하는 장면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자칫 밋밋해질 수 있는 시간이었는데 영화를 보는 내내 그놈의 멍게 때문에 긴장이 되었다. 사람도 아닌 것이 주연까지는 아니고 거의 조연 같은 느낌으로 내 신경을 건드렸다. 아직 공부 중인 딸아이가 취직을 한다면 친정어머니가 그러셨던 것처럼 나도 맛난 밥상 차려놓고 다 같이 둘러앉아 축하를 해줄 텐데 그때 멍게 생각이 날 것 같다. 그때 분명 딸아이 아빠는 소주잔 기울이며 좋아라 할 터인데 나는 멍게 생각하고 있을 것 같아 어쩌지 하는 걱정이 되었다. 내가 멍게를 처음 만난 것은 바다에 대한 추억 하나 제대로 없었던 초등학교 시절이었는데 그 당시로는 서울의 끝자락이라 할 정릉시장의
조선후기에 양인이 부담하는 軍役(군역)을 布(포)로 대신해 국가재정으로 삼았다. 그러다 보니 양인이 군역을 피하기 위해 幼學(유학) 신분으로 위장하는 일이 많아졌다. 이로써 남은 양인의 부담이 무거워졌고 이는 중요한 민생과제로 떠올랐다. 영조대왕은 均役(균역)을 실시하기 위한 방편을 고민했다. 그러나 양반들은 자신에게 군역이 부과되는 것을 반대했다. 세금을 물리는 논밭(田結)에 군역을 물리는 結布(결포)제와 사람에게 물리는 포 대신에 가호단위로 포를 물리자는 戶布(호포)제가 있는데 이는 양자 모두 양반들에게도 군역을 물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고민이 길어지면서 어떤 결론도 내지 못하고 지지부진하다가 대왕 26년에 충청감사 홍계희가 결포를 상소하고 호조판서 박문수가 포 보다는 錢(전)으로 거두
독자를 모독하고자 하는 말이 아님을 밝힌다. 이미 오래전 동명의 영화가 검열에 걸려 ‘시발점’이란 제목으로 제작 된 적이 있다. ‘시발점’도 육두문자를 강조하기위해 점을 넣었을 뿐인데 관계당국은 검열을 통과 시켰다고 한다. ‘병신과 머저리’는 장흥 출신으로 2008년 타계한 소설가 이청준이 1966년에 쓴 소설이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우리사회의 상처와 아픔을 드러내고 갈등관계를 치유해 나가는 과정을 드러내려했다. 이청준은 우리사회의 갈등의 근원에 대한 사색으로 일관된 글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미 20세 근방에서 읽은 ‘불알 깐 마을의 밤’은 강남 AID아파트 부근에 살았던 필자를 포복절도하게도 했지만, 우리사회의 빗나간 구조에 대한 인식을 깨우치게 했다. ‘병신과 머저리’는 6·2
임상호는 옆에서 빙글빙글 웃기만 했다. 전국 곳곳에 집이 있다는 말은 농담이겠지만 서울에 따로 집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선택에게는 딴 세상 같은 소리였다. 그렇게 부자 친구를 둔 김재열이 얼핏 부럽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자신은 생면부지나 다름없는 아버지의 친구 집에서 빌붙듯이 숙식을 해결해야 하는 신세였다. 선택은 그들과 유쾌하게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마음 한편에서는 불안이 쉼 없이 피어올랐다. 마침내 서울역에 기차가 서고 선택과 두 사람은 개찰구를 빠져나왔다. 짧은 겨울해가 이울기 시작하는 다섯 시 무렵이었다. 나가는 사람과 마중을 나온 사람들로 온통 북새통이라 선택을 마중 나온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같이 오게 돼서 심심찮게 잘 왔습니다. 시험들 잘 치시고 꼭 합격하길 바랍니다.”
지리산에 살면서 해마다 봄이 되면 만나게 되는 익숙한 풍경이 있다. 마을에 살지 않는 낯선 사람들이 알록달록한 등산복 차림으로 큰 배낭을 메고 몰려와 온 산을 뒤지고 다니는 모습이다. 해질 무렵이 되면 등에 매달린 배낭이 버거워 보일만큼 나물을 한 짐씩 지고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간다. 사실 이 무렵은 농사가 시작되어 마을사람들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기 때문에 정작 마을사람들은 마을 근처의 산에서 자라고 나는 나물들을 제대로 한 번 맛보지 못하고 짧아서 안타까운 봄을 그냥 보내기 일쑤다. 그러나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보면 조금 다른 봄의 풍경이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해마다 농촌에 오는 봄은 같지만 결코 같지 않은 삶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봄이 거기 있다. 돈이 되는 몇 가지 작물만 키우
3월이 되면 유치원이나 어린이 집에 자녀들을 보내기 위해 구강검진을 받으려는 엄마들이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병원에 많이 오십니다. 또한 4월에는 학생구강검진을 받기 위해서 초등학생들이 부모님과 함께 병원을 찾습니다.제가 치과의사가 되어 막 진료를 시작하던 1980년대 중반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을 느낄 정도로 아이들의 구강관리가 잘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부모님들이 아이들의 치아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갖고 관리를 잘 해주시는 것을 보면 소아치과를 전공한 치과의사로서 참 기쁘고 보람을 느낍니다. 그리고 아이들의 하얗고 건강한 치아를 보는 것은 너무나도 보람되고 즐겁습니다.하지만 가끔은 그렇지 않은 아이들을 보기도 합니다. 유치가 다 썩어서 뿌리만 남아 있거나 아직 영구치가 나올 때가 되지도 않았
격세지감 隔世之感. 심하게 느끼는 말이다. 불과 20여년 전만해도 충분히 살릴 수 있는 치아를 무조건 빼달라고 우겨서 여러 가지 헤프닝이 치과진료실에서 일어났었다. “내 이빨 내가 빼달라는데 빼주면 되지, 뭐 그렇게 말이 많냐?” 억지로 설득해 빼지 않게 되더라도 계속되어야 할 신경치료를 통증만 모면하면 받지 않아 결국 뺄 수밖에 없는 상태에서 다시 만나게 돼 상심한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차라리 빼달라고 할 때 빼줄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들정도 였다.하지만 얼마 전 부터는 무조건 빼지 않겠다는 사람들과의 실랑이가 진료실에서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물론 이렇게 된 것에 자연치를 보존시키려는 치과의사들의 노력도 일조를 했으리라는 것에 위로를 받지만, 이 또한 난감한 상황이긴 마찬가지다. 자연치아를 빼는 것은
며칠 전엔 경칩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눈이 10cm는 쌓였으니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는 말이 그냥 전해온 말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하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스프링처럼 튀어 오르는 봄의 기운을 이길 장사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가보다. 하우스 안이 아니라도 여기저기서 새싹들이 얼굴을 내밀고 자기를 쳐다보라며 갖은 아양을 떨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 집의 마당 한쪽에 있는 손바닥만 한 땅뙈기에서도 머위, 산부추, 방풍, 잔대, 삽주, 움파, 더덕, 돌나물, 더덕, 도라지 등 수많은 싹들이 저마다 쑥쑥 올라오고 있으니 그것을 쳐다보는 재미 또한 꽤나 제법이다. 일부러 심지 않아도 절로 퍼져 나는 것들까지 합치면 지금부터 우리 집은 야채를 사러 장에 가는 일은 거의 없을 만큼 풍성한 먹을거리의 향연이 시작된다.
고등학교 시험을 치러 올라갈 때는 기차를 타고 갔다. 시험에 붙을지 떨어질지 전혀 가늠을 할 수 없었다. 마침내 큰 세상으로 나가게 될지, 주저앉아 다시 고향에서 할아버지 말대로 가업을 이어 농사를 짓게 될지는 오로지 시험에 달려 있었다. 기차 안에서 선택은 이재형 선생이 구해준 수험서를 꺼내 다시 들여다보았다. 이미 수도 없이 되풀이해서 풀어보았던 문제들이었다. 그 정도 수준이라면 그다지 어려울 것 같지는 않았다. 대전역에 기차가 멈추었을 때 교복을 입은 학생 둘이 올라와 선택의 자리 맞은편에 앉았다. “늬는 이번 시험 자신 있지?” “자신은 무슨? 내 실력이 서울 아들하고 경쟁이 될라나 모르겄다.” “늬가 안 되믄 우리 학교서 누가 서울로 가겄나? 늬는 될 거다. 나는 솔직히
제주도에서 올라온 무가 너무 좋은데 값이 형편없다고 아내가 걱정이다. 크고 잘생긴 무를 깍둑 썰어 깍두기를 만든다. 깍두기 국물에 밥 한 그릇 뚝딱하고 나면 춘곤증에 그만 나른해진다. 겨울을 나면서 쉬어 터진 김장김치에 물린 입맛을 사로잡는데 그만이다. 깍두기는 그렇게 우리 김치문화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또 다른 깍두기가 있다. 물론 조직폭력배들을 깍두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외모가 그렇게 연상되어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 깍두기 보다 우리에게 친근한 깍두기는 따로 있다. 어린 날 놀이를 할 때 편을 가르는데 짝이 맞질 않으면 그중 나이어린 아이는 그냥 깍두기라고 한다. 그때 깍두기는 이편도 저편도 아니다. 게임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이쪽도 거들고 저쪽도 거든다. 게임의 목적이 함께 하기 위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