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정신문 심증식 기자]지난달 24일 경기도 남양주시 마석 모란공원묘지 민주열사묘역에서 전국농민회총연맹 회원 3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고 전용철 열사 14주기 추모제가 열렸다(사진).이날 김영석 전용철 열사 추모사업회 위원장은 “전용철 열사는 2005년 쌀 재협상 저지를 위해 싸우다 돌아가셨다. 열사께서 돌아가신 지 14년이 지났지만 지소미아 사태에서 보듯이 민족의 자주권이 심각하게 침해되고 있다”며 “열사의 뜻을 이어 우리 농업을 지키고 민족의 자주와 통일을 이루기 위해 더욱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박기수 전농 부의장은 추모사
[한국농정신문 심증식 편집국장]1950년대 초 어느 여름날이다. 초등학교 5학년 임봉재는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자마자 보리밥 소쿠리를 찾았다. “그때는 보리밥도 간신히 먹을 때였어요. 여름에는 소쿠리에 보리밥을 담아 처마 밑에 두고 학교 마치면 그걸 꺼내서 점심으로 먹었죠. 그런데 그날은 아무 것도 없는 거예요. 부엌에 가서 가마솥 뚜껑을 열어봐도 뭐가 없더라고요. 방안에 계신 어머니가 인기척을 듣고는 모기소리로 ‘봉재야 봉재야’ 하고 부르셨어요.”방문을 열어 보니 어머니 혼자 아이를 낳으셨다. “어머니가 물 한 그릇 달라고 하시는
[한국농정신문 심증식 편집국장]농업관련노동조합협의회(회장 전병준 전 마사회노조위원장. 농관련노조협)는 지난 1일 세종시 가축위생방역지원본부(방역지원본부)에서 농관련노조협의회 정례회의를 개최하고 아프리카돼지열병(ASF) 방역으로 고생하는 가축위생방역지원본부 조합원들에게 위로금을 전했다. 전병준 농관련노조협의회장은 “지난 9월 17일 경기도 파주에서 아프리카돼지열병이 발생한 이후 방역지원본부 경기 북부지역의 노동조합원들이 휴일도 없이 방역활동에 노고가 크다”며 감사 인사와 더불어 김필성 방역지원본부 노조위원장에게 위로금을 전달했다. 이
[대담 심증식 편집국장, 정리 강선일 기자, 사진 한승호 기자]촛불혁명 직후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3대 과제 중 하나로 ‘풍요로운 농촌 건설’을 강조한 이유가 궁금하다.농촌문제를 해결해야 남북화해와 경제민주화 문제 해결로 나아갈 수 있다. 농촌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가장 힘없고 가장 선거에 영향을 끼칠 수 없는 곳인 양 인식된다. 농촌은 국가의 기본이자 존재 자체가 국민의 권리이며 식량 공급의 장일 뿐 아니라, 국토를 보전하기 위한 우리 민족의 가장 중요한 자산이다. 그럼에도 (집권자들 입장에서 농민이) 힘없고 맥아리 없다 여겨
[한국농정신문 심증식 편집국장, 사진 한승호 기자]2016년 11월 촛불집회를 앞두고 우리시대의 철학자이자 사상가로 시대의 나침반 역할을 해 온 도올 김용옥 선생은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3대 과제를 제시했다. 첫 번째가 ‘남북 화해’, 두 번째가 ‘경제민주화’, 세 번째가 ‘풍요로운 농촌 건설’이었다. 평생을 공부에 매달려온 대학자가 ‘풍요로운 농촌 건설’을 시대의 과제로 제시한 것이 이채롭다. 이미 농업·농촌·농민은 사회적 관심사에서 사라져버린지 오래다. 농촌은 낙후되고 피폐되는 것이 당연시되는 상황에 도올은 강력한 제동을 건
[한국농정신문 심증식 편집국장]충남 홍성군 홍동면 ‘젊은협업농장 정민철 박사’하면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농업 쪽에서 나름대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특이한 이력과 활동 탓이다. ‘박사’가 농사를 한다는 것도 의외인데 협업농장까지 운영하고 있다. 마을, 농촌, 공동체는 정민철 박사와 연결되는 단어들이다. 농업경제학이나 농촌사회학을 전공했을 것으로 예상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나 정민철 박사는 미생물학 박사이다.“경주가 고향이예요. 아버지는 학교선생님이셨죠. 학교는 대구에서 다녔구요. 공부만 했을 뿐 농사는 생각도 안 해봤어요.”
[한국농정신문 심증식 편집국장]“전남 보성군 노동면 거석리에서 나서 한 번도 주민등록을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았어. 군대도 안 갔고, 전농 의장할 때 서울 왔다 갔다 한 거 빼고는 타지에 적을 둔 적이 없어. 그야말로 토박이야.” 문경식씨는 대를 이어 고향을 지키며 살아온 전형적인 농민이고 농촌사람이다.“10살 때부터 할머니 손잡고 농사일 배우러 다녔어. 내가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됐지. 10식구가 한 집에 살았는데 일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어.” 그는 전남 보성의 가난한 집안 7남매 중 넷째, 아들로는 둘째로 태어났다. 위로 세분의
[한국농정신문 심증식 편집국장]김대중정부 시절, 김성훈 농림부 장관은 유기농업을 권장하며 친환경농업육성법을 제정했다. 그 시절 경기도 양평군 팔당 지역에서는 농민들이 팔당 상수원 유기농운동본부를 만들었다. 팔당 인근은 한강 상류지역이자 상수도 취수장이 있어 물관리가 중요하기 때문에 농사도 유기농으로 짓자는 의미다. 한강물을 상수원으로 사용하는 서울시에서 지원하고 농협도 힘을 보탰다.팔당 지역은 서울과 가까워 오래 전부터 근교농업이 발달했고 시설채소가 주로 재배됐다. 관행으로 짓던 농약·비료 농사가 정부의 친환경농업육성 정책에 힘입어
‘압구정’은 한명회가 지은 정자다. 이후 압구정은 조선 말기 철종의 부마인 박영효에게 하사됐다가 갑신정변으로 박영효가 실각되면서 사라지게 됐다. 지금은 압구정, 정자는 사라졌지만 지명으로 남아있고 부유하고 화려한 강남의 상징으로 남아있다.압구정은 한도숙 전 의장의 고향이기도 하다. 강남개발이 시작되기 전 압구정은 배받이었다. 한 전 의장의 아버지는 대지주의 마름으로 살았다. 지주보다 더 악독하다는 그 ‘마름’이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는 착한 마름이었다고 한다.그래서 수십 년 마름을 하면서도 땅 한 평 차지하지 못했다. 한 전 의장은
[한국농정신문 심증식 편집국장]자유무역을 강화하고 확대하기 위해 1986년 9월 우루과이에 세계 각국의 통상관료들이 모였다. UR협상으로 알려진 우루과이라운드의 시작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농산물이 자유무역 영역으로 들어오게 됐다. 1994년 UR협상이 타결되고 1995년 발효되면서 우리 농정은 전환기를 맞았다. 농정은 수입개방에 맞춰 국제경쟁력을 갖추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소위 말하는 개방농정의 시작인 것이다.규모를 확대하고 시설과 기계를 들여 생산성을 높여야 수입농산물에 맞서 우리 농업을 지킬 수 있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역설적으
[한국농정신문 심증식 편집국장]“1973년 2월 13일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이틀 뒤인 15일에 서울로 애기 보러 갔어요. 서울로 식모 살러 간 거죠. 하도 공부를 하려고 하니까 학교 선생님이 애기 보면서 공부할 수 있는 곳에 보내준다고 했어요. 그런데 동네 아줌마가 석 달만 애기 보면 기술 가르쳐 주는 곳이 있다고 거기로 가자고 해서 하룻밤 사이에 맘을 바꿔 서울로 간 거죠.”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김순애씨는 공부는커녕 끼니도 제대로 때우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5남매 중 맏딸. 아버지는 유독 맏딸을 미워했다고 한다. 그래서 학교도
[한국농정신문 심증식 편집국장] 네덜란드의 농촌사회학자 얀 다우 판 더르 플루흐 교수는 그의 저서 ‘새로운 농민’에서 “인류역사에서 이처럼 농민이 많았던 적이 없었다”면서 “가장 보수적인 추정치도 약 5억에서 5억6,000만개의 농민농장이 있다고 보는데 그 수가 계속 늘고 있다”고 밝혔다.농민이 줄어들고 농촌이 공동화돼 가는 우리 현실에서 공감하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다. 아니 농민이라는 단어조차 농업인으로 대체돼 사그라지고 있지 않은가.1990년대 전면적 농산물 개방에 맞춰 우리 농업에선 경쟁력 강화가 농정 최고의 목표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