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구정’은 한명회가 지은 정자다. 이후 압구정은 조선 말기 철종의 부마인 박영효에게 하사됐다가 갑신정변으로 박영효가 실각되면서 사라지게 됐다. 지금은 압구정, 정자는 사라졌지만 지명으로 남아있고 부유하고 화려한 강남의 상징으로 남아있다.압구정은 한도숙 전 의장의 고향이기도 하다. 강남개발이 시작되기 전 압구정은 배받이었다. 한 전 의장의 아버지는 대지주의 마름으로 살았다. 지주보다 더 악독하다는 그 ‘마름’이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는 착한 마름이었다고 한다.그래서 수십 년 마름을 하면서도 땅 한 평 차지하지 못했다. 한 전 의장은
[한국농정신문 심증식 편집국장]자유무역을 강화하고 확대하기 위해 1986년 9월 우루과이에 세계 각국의 통상관료들이 모였다. UR협상으로 알려진 우루과이라운드의 시작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농산물이 자유무역 영역으로 들어오게 됐다. 1994년 UR협상이 타결되고 1995년 발효되면서 우리 농정은 전환기를 맞았다. 농정은 수입개방에 맞춰 국제경쟁력을 갖추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소위 말하는 개방농정의 시작인 것이다.규모를 확대하고 시설과 기계를 들여 생산성을 높여야 수입농산물에 맞서 우리 농업을 지킬 수 있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역설적으
[한국농정신문 심증식 편집국장]“1973년 2월 13일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이틀 뒤인 15일에 서울로 애기 보러 갔어요. 서울로 식모 살러 간 거죠. 하도 공부를 하려고 하니까 학교 선생님이 애기 보면서 공부할 수 있는 곳에 보내준다고 했어요. 그런데 동네 아줌마가 석 달만 애기 보면 기술 가르쳐 주는 곳이 있다고 거기로 가자고 해서 하룻밤 사이에 맘을 바꿔 서울로 간 거죠.”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김순애씨는 공부는커녕 끼니도 제대로 때우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5남매 중 맏딸. 아버지는 유독 맏딸을 미워했다고 한다. 그래서 학교도
[한국농정신문 심증식 편집국장] 네덜란드의 농촌사회학자 얀 다우 판 더르 플루흐 교수는 그의 저서 ‘새로운 농민’에서 “인류역사에서 이처럼 농민이 많았던 적이 없었다”면서 “가장 보수적인 추정치도 약 5억에서 5억6,000만개의 농민농장이 있다고 보는데 그 수가 계속 늘고 있다”고 밝혔다.농민이 줄어들고 농촌이 공동화돼 가는 우리 현실에서 공감하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다. 아니 농민이라는 단어조차 농업인으로 대체돼 사그라지고 있지 않은가.1990년대 전면적 농산물 개방에 맞춰 우리 농업에선 경쟁력 강화가 농정 최고의 목표가 됐다
[한국농정신문 심증식 편집국장] “저는 모태유기농 농부예요. 부모님께서 결혼서약으로 죽을 때까지 유기농사를 짓겠다고 약속하셨어요. 정농회 회원이셨는데 회원들 앞에서 결혼식을 하면서 그렇게 했다고 해요.”강선아씨는 우리나라 유기농의 1세대이고 최초로 쌀 유기농인증을 받은 전남 보성농민 강대인씨의 딸이다. 강대인 선생은 우리나라 유기농업의 역사를 써온 분으로, 유기농 선구자이며 일반 사람들에게는 낯선 생명역동농업의 선구자이기도 하다.매일 논밭에서 일하던 부모님그러나 유년시절 그녀에게 아버지 어머니는 매일 논밭에서 일하는 농부일 뿐이었다
[한국농정신문 심증식 편집국장]“지난해 10월부터 시작한 통일트랙터 품앗이 운동은 판문점선언 1주년 되는 4월 27일 일단락 지으려 합니다. 지금까지 모금해서 마련한 트랙터를 가지고 북으로 갈 계획입니다. 트랙터로 논·밭갈이를 해야 할 시기잖아요. 판문점선언 1주년에 맞춰 임진각으로 트랙터를 끌고 갈 예정입니다. 물론 미국의 대북제재 때문에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그래도 시도해 봐야죠. 트랙터 가져다 주는 것이 안 되면 북녁땅 연백평야에 가서 논갈이 해주고 다시 끌고 내려오면 되지 않겠습니까. 농민들이 가서 논갈이 해주고 오
전북 익산 어느 찻집에서 만난 김영재 회장은 기자를 만나자마자 두툼함 봉투에서 농협 관련 서류를 꺼내 놓고 지역농협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익산군산축협의 고정자산 취득 과정에서 절차와 규정을 어긴 여러 가지 의혹이 있다는 이야기다.“2017년 익산군산축협 임시총회에서 축산물종합판매장 부지 매입을 승인해줬습니다. 그런데 매입 과정에서 갑자기 부지가 건물로 변한 거예요. 그러면 총회에서 용도조정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그런 절차가 없었어요. 그리고 건물 매입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법인이 설립돼 법인에서 이 건물을 20억에 매입
[한국농정신문 심증식 편집국장]농사경력 25년 조원희. 농민으로써 이름이 있는 사람이다. 지난 25년간 해왔던 일도 많고 하고 있는 일도 많았다. 지금도 그가 맡고 있는 직책이 6~7개가 넘는다. 경북 상주시 낙동면 승곡리 이곳은 조씨의 고향이다.농사를 지었던 부모님은 일찍이 자식들을 서울로 보냈다. 그 역시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서울생활을 했다. 서울 작은아버지집 근처에 방을 얻어 서울 유학을 했던 것이다. 그 시절 두메산골이나 다름없는 낙동면 승곡리에서 부모님은 어려운 살림에도 자식들을 가르치기 위해 서울 유학을 보냈다.“지금
[한국농정신문 심증식 편집국장]새해가 밝았다.2019년은 문재인정부가 농정개혁을 실시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지난해는 장기간의 농정공백으로 농정개혁에 대한 기대가 실망과 좌절로 점철됐다. 설상가상으로 대통령은 농업에 대한 일말의 관심조차 피력하지 않았다. 청와대의 전언에 따르면 문재인 대통령이 틈틈이 농정을 챙기고 있다고 하지만, 대통령의 농업에 대한 관심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새 정부 출범 2년차를 맞아도 이렇다 할 농정개혁안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반기에 접어들면서 문재인정부의 농정개혁에 밑그림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장기간 농정공백’. 2018년 우리 농업이 처한 상황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2017년 5월 9일 촛불항쟁의 결과로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돼 취임한다. 그리고 2개월 만에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으로 김영록 전 의원이 취임했다.김 장관은 취임 한 달 후 농정개혁 의지로 농식품부 산하에 농정개혁위원회(농개위)를 설치한다. 그러나 농개위는 위원 선임에서부터 농정개혁과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균형이라는 이름으로 구색 맞추기 위원선임에 불과했고 농개위라는 이름을 무색하게 만들었다.이마저도 오래가지 못했다. 김 장관이 중도 사퇴해 물거품이
[한국농정신문 심증식 편집국장]농민들이 모이는 투쟁의 현장인 아스팔트 위에 항상 눈에 띄는 분이 있다. 생활한복 차림에 긴 수염이 상징인 원로농민 배종렬씨다. 배씨를 아는 사람은 전 전농 의장, 전남서남부채소농협 조합장 정도로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배 전 의장은 농민운동의 역사를 끌어 왔으며 여전히 농민운동 현장이라 할 아스팔트를 지키는 ‘현역 운동가’이다.기자가 그를 찾기 며칠 전, ‘밥 한 공기 300원 보장’과 민주당이 야당시절 주장했던 쌀값보다 못한 목표가격 제시에 항의하기 위해 국회 의원회관을 찾은 농민들을 이해찬
[한국농정신문 심증식 편집국장]백남기 농민이 경찰 물대포에 쓰러진 지 3년이 지났다. 2015년 11월 14일 민중총궐기를 이끌어 냈던 전국농민회총연맹 김영호 의장은 올 1월 임기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김영호 전 의장의 일터인 충남 예산 육인농장 유리온실에선 파프리카가 자라고 있다. 아직 수확하려면 한 달 정도 더 있어야 한다. 유리온실에 들어서니 파프리카는 주먹만 하게 컸지만 아직 초록색이다. 앞으로 한 달 후면 빨간색 노란색 알록달록 색이 물들어 수확이 가능해진다. 김 전 의장은 작은 돋보기를 들고 다니면서 파프리카 잎의
[한국농정신문 심증식 편집국장] 밥 한 공기 300원, 올해 농민들은 이구동성으로 외치고 있다. 1,000원짜리 밥 한 공기에 들어가는 쌀값이 240원에 불과하다. 쌀값이 19만원 넘었을 때를 기준 삼아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폭락했던 쌀값이 회복되자 언론에서는 쌀값 폭등이라는 왜곡된 보도를 양산하고 있다. 정부 역시 부화뇌동하듯 수확기에 비축미 방출 계획을 발표하며 쌀값회복을 억제하러 나섰다.2015년 11월 14일 박근혜정권의 패악질이 극에 달하자 더 이상 버티기 어려운 민중들이 서울로 모였다. 농민들은 계속 농사짓고 살게
중환자실 생활이 계속되자 ‘이제는 죽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을 앞에 두자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지고 마음정리가 됐다. 그러자 이 세상 모두가 깨끗하고 분홍빛으로 보였다. 그동안 밉게만 생각하던 남편마저도 예쁘게 느껴졌다. 흉부외과 선생님께도 아이들을 부탁한다는 유언도 남겼다. 그렇게 한참을 꿈꾸며 자다 깨어보니 나는 숨을 쉬고 있었다. 애들을 생각해서라도 다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코에 호스를 꽂은 채 이를 악물고 미음 한 숟가락씩 목구멍으로 내렸다. 곡기가 위장 속으로 들어가니 정말 신기하게도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전남 해남군 현산면 오분임씨를 찾았다. 올해 여든을 넘긴 세대의 사람들치고 인생역전이 파란만장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이들은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그리고 가난 군사독재로 이어지는 지난한 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어왔다. 오분임씨의 인생이 곧 우리 현대사이다.“6살 때 우리 아버지가 일본놈들에게 끌려갔어. 일본순사가 하얀 옷 입고 칼 차고 돌아다녔는데 사람들 모두 일본놈들 무서워했어. 그런데 어린 맘에 우리 아버지 끌고 간 사람이 누군가 하고 따라다니고, 일본순사가 지나가면 담벼락 넘어서 쳐다보기도 했지. 엄마가 따라다니지 말라고
[한국농정신문 심증식 편집국장]나 태어난 이 강산에 농민이 되어꽃 피고 눈 내리기 어언 삼십년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나 죽어 이 흙 속에 묻히면 그만이지 아 다시 못 올 흘러간 내 청춘흰옷에 실려 간 꽃다운 이 내 청춘김민기가 작사 작곡한 ‘늙은 군인의 노래’ 일부다. 농민대회에서는 ‘군인’ 대신 ‘농민’으로 바꿔서 불렀다. 경남 거창의 공기영 씨는 ‘늙은 농민의 노래’를 떠 올리게 하는 사람이다.‘30만 농민대항쟁’ 경찰 방해에 맞서다“노무현 대통령이 후보로 출마했을 때야. 그때 농민회장이 정쌍은 씨였는데, 교통사고로 병원
[한국농정신문 심증식 편집국장]강원도 철원군 서면 와수리에 사는 한현수씨는 이력이 특이한 농민이다. 올해 나이가 여든인 그는 50년 전 월부장사를 하려고 이곳 철원으로 왔다.“원래 고향은 경기도 가평이야. 이곳에서 멀지 않은 현리라는 곳에서 월부장사를 했어.” 월부장사는 1960~1970년대에 성행했다. 목돈이 없는 사람들이 살림살이를 장만하기 위해 매달 형편껏 나눠서 돈을 내 물건을 들이는 것이다. 오늘날 할부 판매와 비슷하다. “현리에서 월부장사를 하다가 철원에 군인가족이 많으니까 오게 됐어. 그때가 1967년이니까 50년이 넘
[한국농정신문 심증식 편집국장]강원도 원주 출신의 이창복(80) 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 상임대표의장은 1958년 고려대학교에 들어갔다. 대학에 다니면서 이창복 의장은 당시에 씨알소리의 함석헌 선생과 서울대학교 유달영 박사의 강의를 들으러 다녔다. 이분들의 강연 내용은 농촌을 살려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당시 어려운 농촌을 살리는 것은 사회의 가장 큰 과제였고, 사회적 책임의식을 가진 지식인들의 중요한 관심사였다.이상적인 농촌 건설의 꿈, 학업으로 이어“함석헌 선생과 유달영 박사의 강연을 들으며 농촌에 기여해야 한다는 마음을
[한국농정신문 심증식 편집국장]전북 익산의 들판이 푸르게 변하고 있다. 이제 모내기가 끝났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이곳에서는 밀 수확과 모내기가 동시에 이뤄지고 있다. 한쪽에서는 콤바인이 밀을 베고 있고 밀 수확이 끝난 논 여기저기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밀짚을 태우는 것이다. 밀짚을 태운 논에서는 물을 대고 트랙터가 부지런히 로터리 작업을 한다.옛말에 5월 농부, 8월 신선이라고 일 년 중 가장 바쁜 철이 모내기철이라지만 이렇게 2모작 농사를 하는 곳은 수확과 모내기를 동시에 해야 하기에 더욱 분주하다.5월 중순부터 시작
[한국농정신문 심증식 편집국장]경기도 평택군 청북면 옥길리. 불과 20년 전만 해도 전형적인 농촌지역으로 평택에서는 오지에 속하는 곳이었다. 버스가 하루에 두 번 밖에 들어오지 않는 곳으로 마을 사람들은 모두 농사를 지었다. 특히 옥길리는 노각(늙은 오이) 주산지였다. 전국 노지 노각의 90%가 옥길리에서 생산된다고 할 정도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롭고 순박한 농촌마을은 평택군에서 평택시로 바뀌고, 청북면이 청북읍으로 승격(?)하면서 농촌의 자취가 사라져 갔다. 옥길리에서 농촌의 자취가 사라져 갔다는 것은 결국 이곳이 고향인 농민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