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6월 어느 날에 김미성 가수를 만났다. 나는 우선 약속 장소에 나타난 그의 차림새에 조금 놀랐다. 환갑이 넘은 나이(61세)였음에도 노출이 과하다 싶은 민소매 가죽 자켓에다 허옇게 닳은 청바지를 받쳐 입었다. 허리에는 옛 서부영화에 나오는 배우들이나 착용했음 직한 요란한 장식이 달린 가죽 벨트를 둘렀다. 누가 봐도 ‘무대의상’이었는데, 그는 평상복 차림이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역시 ‘연예인’이었다. 그가 내게 물었다.“대중가요 좋아하세요? 제 노래 중에서 혹시 아는 노래가…”“물론 있지요. ‘꽃길 따라 걷던 길에 비
1960년대 말쯤, 시골의 어느 남자 중학교 교실의 점심시간 풍경을 구경해보자.-에, 그러면, 20일 동안의 동남아 순회공연을 마치고 김포공항을 통해 어제 막 귀국한 대한민국 최고의 명카수 김달수의 노래가 있겠습니다!자칭 오락부장이 책받침을 동그랗게 말아서 마이크 삼아 들고는 호들갑을 떤다. 학생들은 손뼉을 치거나, 도시락 뚜껑을 두드리거나. 혹은 휘파람을 불면서 환호한다, 김달수가 책받침 마이크를 건네받고는 큼큼, 목청을 다듬더니 한껏 감정에 겨운 목소리로 노래를 시작한다.-‘삼각지 로타리엔 궂은비는 오는데 / 잃어버린 그 사람을
남산 식물원 아래쪽에는 자그마한 규모의 동물원이 있었다. 남산공원 관계자들은 이 동물원을 소동물원(小動物園)이라 불렀다. 그 호칭이 굳어져서 ‘남산 소동물원’이 공식 명칭이 됐는데, 아마도 서울에 있었던 큰 동물원(창경원)을 의식하고 붙인 이름이 아니었을까?“식물원을 개관하고 나서 3년여가 지난 1971년에 문을 열었는데, 처음엔 30여 종 230여 마리쯤 됐을 거예요. 그 중엔 꽃사슴이나 원숭이 같은 동물들도 있었으나, 원앙이나 공작 등 새 종류가 많았어요. 부모가 아이들 데리고 오거나 혹은 단체로 소풍 온 아이들이 식물원을 관람
남산공원의 여러 시설 중에서 일요일이 되면 새벽부터 장사진을 이루는 곳이 있었다. 시립 남산도서관이었다. 일요일마다 늘 그랬던 것은 아니고, 주로 중고등학생들의 시험 기간이 낀 일요일이면 예외 없이 열람석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했다.학생들은 도서관에 가서 무슨 특별한 자료를 열람하거나, 책을 대출받아 읽는 경우는 드물었다. 고등학생들의 책가방에는 교과서와 노트, 혹은 나 따위의 참고서가 들어 있었다. 그들은 ‘도서’가 필요해서 도서관에 간 것이 아니었다. 다만 앉을 ‘자리’가 필요해서 몰려
가족 단위로 공원에 올라 식물원을 관람하고, 연인끼리 케이블카에 올라타 공중을 나는 짜릿한 체험을 하고, 친구와 전망대에 올라 시가지를 조망하고…. 하지만 남산이 늘 그렇게 건전한 휴식처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자, 서울 시내 야경 관광할 사람 버스에 타세요! 두 사람만 더 타면 떠납니다! 기가 막힌 서울 밤 풍경 구경 갈 사람 얼른 타세요! 에이, 그냥 출발해야겠다. 자, 출발합시다, 오라이!초저녁, 화신백화점 앞 등의 종로통이나 광화문 부근에서는 서울의 밤 풍경을 구경시켜준다는 관광회사의 버스들이 진을 치고 있었는데, 이곳저
남산의 ‘서울타워’에 오른 사람들에게는 일절 사진을 찍지 못하도록 통제했는데, 전망대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도 마찬가지였다. 팔각정 부근에서도, 주요 건물이나 특히 청와대가 내려다보인다 해서, 시내 쪽을 향해서는 카메라 셔터를 누르지 못하게 막아섰다.-여기는 통제구역이니까 저 아래 분수대 쪽에 내려가서 실컷 찍으세요!경비원이 카메라를 가리면서 ‘사진 찍으려면 분수대 쪽으로 가보라’며 돌려세우는데, 그렇지 않아도 식물원 앞 분수대는 관광객들에게 사진 촬영지로 이미 각광을 받고 있었다.“분수대 앞 광장에 가면요, 공원관리소로부터
1961년 9월, 남산 팔각정에서 케이블카 설치를 위한 기공식이 열렸다. 그리고 이듬해인 1962년 4월에 운행을 시작했다. 서울에서는 케이블카가 이때 처음 선을 보인 것이다.케이블카의 시내 쪽 승강장은 중구 회현동 산1번지, 지금의 숭의여대 옆이다. 거기서부터 팔각정 인근의 도착지점까지는 600여 미터에 불과했기 때문에, 탑승 시간이라야 겨우 3분 남짓이었다. 조금 과장해서 표현하면 ‘탔다 하면 내릴’ 준비를 해야 할 만큼 잠깐이었는데, 그럼에도 그 짧은 경험을 하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의 행렬이 승강장 매표소 앞에 길게 이어졌다.
남산 순환로에서 정상의 팔각정에 오르는 길이 포장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고, 1970년대엔 그냥 흙바닥 길이었다. 평일에도 많은 사람이 남산을 찾았지만, 주말이 되면 몰려드는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고 최상인 남산식물원 원장은 회고한다.“그 시절에는 입장료가 있었어요. 국민학생 이하의 소인은 100원, 중고생은 200원, 성인은 300원씩 받았지요. 사실 시민들의 세금으로 공원을 운영하고 개방한 것인데 입장료를 따로 받아서는 안 되는 거였어요. 당시 남산에 찾아온 사람들은 대부분은 정상까지 올라갔다 와야 직성이 풀린다고 생각했는
-자네 이참에 서울 갔다가 구경 잘하고 왔는가?-아먼. 우리 둘째 아들놈이 서울에서 큰 공장에 댕기는디 말여, 고놈 덕분에 창경원에 가서 호랭이도 보고, 징허게 큰 구렁이도 보고….-그라먼 남산에는 올라가 봤는가?-아, 서울 갔다가 남산 귀경 안 하고 왔겄어. 꼭대기까장 올라가서 그 뭣이냐, 팔각정에서 떠억 내려다 보니께, 와, 남대문이 아그들 장난감만하게 뵉이드랑께.-그라먼 케이블…그 머시기도 타봤어? 전깃줄 타고 공중으로 쭈욱 날아가는 버스 말이여.-그것은 못 타봤구먼.-나는 지지난해에 서울 가서 우리 딸내미랑 같이 타봤제, 허
서기 2002년 6월 초순의 어느 이른 아침, 서울특별시 중구 회현동 쪽의 남산공원 입구에 승용차 한 대가 달려와 멎더니 50대 후반의 한 남자가 차에서 내린다. 그가 서둘러 들어간 곳은 남산 식물원이다. 식물원에 들어간 그는 누군가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눈다.-어디 이 녀석들 밤새 잘 있었는지 문안 인사를 좀 받아볼까. 어이구, 이 녀석은 이파리에 주근깨가 생긴 걸 보니 영양 상태가 안 좋은 모양이로구나. 넌 또 왜 맥이 빠져 있는 것이야? 알았다, 알았어. 목이 마르다 이 말씀이지?식물원의 통로를 따라 여기저기를 옮겨 다니며 마
1960년대 중반에 군을 제대한 총각 박해수는, 한지 만드는 일을 보다 규모 있게 해 보겠다고 작심하고는, 집안에다 공장을 새로 차렸다. 닥나무 다발을 개울가로 가져가 쪄서 껍질을 벗기고…하는 방식으로는 작업도 힘들뿐더러 생산량도 한계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작업환경이 그렇게 열악해서는, 장가를 가는 데에 애로가 있었다.-집에서 종이를 만든다고예? 그거 엄청시리 힘들다카던데….-아입니더. 이번에 공장을 새로 차려서 완전히 신식으로 종이를 만듭니더. 그라고 작업은 인부들이 다 맡아서 하이깨네, 내한테 시집오면 고생시러운
아무리 가난한 집이라도 추석 명절을 앞두고는 방문의 창호지를 새로 발랐다.음력 7월의 어느 일요일, 아침밥을 먹고 나자 아버지는 이 방 저 방의 문짝들을 분리해서는 마당의 평상에다 걸쳐 놓았다. 큰방 작은방 할 것 없이 앞뒷문을 모두 문틀에서 뜯어낸 것이다. 방문은 늘 그 자리에 고정돼있는 것으로만 알고 있던 어린아이들에게는, 암수가 결합돼 있던 돌쩌귀를 훌쩍 벗겨내어 순식간에 문짝을 분리해버린 아버지의 동작은, 무슨 요술을 부린 것만 같았다.-퍼뜩 나와서 문종이 벗겨라!평소엔 창호지 문에 작은 구멍이라도 낼라치면 호된 지청구로 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