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도에 다리를 놓아서 육지와 연결하겠다는 일제 당국의 계획이 구체화하자, 배를 부려 먹고사는 선주들이 격렬하게 저항을 하고 나섰다. 선주 중에서도 원양까지 나다니며 고기잡이를 해온 대형 어선 임자들의 반대가 특히 심했다.-우리 어선은 쓰시마까지 가서 고기잽이를 하는 큰 밴데, 다리가 생기모 영도 안쪽으로는 몬 지나 댕기고 저 배깥으로 한 바쿠를 삐잉 돌아 댕겨야 할 거 아이가. 그 기름 값을 행정관청에서 공짜로 대준다카드나?-다리 생기모 자갈치 시장이고 항구고 뭣이고 다 망한다카이.-작은 배는 교각 새다구로 끼어 댕길 수 있으이깨네
“식민지 시절에 일본군 기마병들이 말 타고 다니는 사진들 많이 봤지요? 그 기마대의 말들을 영도에서 기르고 관리했어요. 영도에 군마장이 두 개나 조성돼 있었거든요. 뿐만 아니라 일본의 관동을 출발한 선박이 중국대륙으로 진출하려면 함경도의 나진으로 올라가야 하잖아요. 그 대형 선박을 타고 부산부두에 들어온 일본군은, 반드시 태종대 쪽에 건설한 육군휴양소에 머물렀다가 나진으로 올라갔어요. 한 번에 만 명도 오고 이만 명도 왔지요. 게다가 태종대에 서치라이트부대, 고사포부대, 해안포기지까지 설치했는데….”영도의 향토사학자 부성수 씨의 얘
-한 마디로 말해서, 우리 대일본제국이 중국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조선반도의 해안에 그 전진기지가 필요한데, 군사 요새를 만들기에 이 곳 영도만한 적지가 따로 없습니다.-영도에 군사기지를 조성한다? 흐음, 어디 그 구체적인 계획을 한 번 설명해 보게.-자, 이 괘도에 보이는 그림이 영도의 지형을 확대한 것입니다. 여기 이 곳, 봉래와 영선동 일대에는 우리 천황폐하 군대의 군마 주둔지를 설치할 예정입니다. 또한 여기 보이는 이 쪽 태종산에는 육군 휴게소가 들어서게 됩니다. 이제부터가 아주 중요한데요, 저 쪽 해안 절벽 위에는 야간
영도의 본디 이름은 절영도다. 에는 ‘절영도’라는 섬 이름이 수도 없이 등장하고, 멀리는 열전편의 에도 올라있다. 그 섬은 예부터 말 기르는 곳으로 유명해서 일찍이 나라에서 관리하는 목장인 국마장(國馬場)이 있었다. 그런 탓으로 그 조그만 섬이, 국가대사를 기록해 놓은 역사문헌에도 빈번하게 등장할 정도로 대접을 받아왔다.이름의 유래가 재밌다. 그 섬에서 기르는 말은 워낙 준수한 명마여서, 일단 달음박질을 했다 하면 ‘그림자(影)’가 달리는 말을 따라잡지 못 하고 ‘끊어진다(絶)’ 하여, 섬 이름
나는 육군 일등병 첫 휴가 때 처음으로 부산이라는 도시엘 가봤다. 막내 외삼촌이 개금동인가 하는 동네에서 유리가게를 하고 있을 때였다. 하지만 난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부산의 이모저모를 상당한 수준으로(?) 꿰고 있었다.내가 나서 자란 곳은 조선시대로 치면 전라우수영 소속의 작은 섬마을이었으므로, 경상좌수영의 본영이 있던 부산은 말만 같은 남해안이지 거리로 치면 이쪽 끝과 저쪽 끝이었다. 그럼에도 어린 시절부터 부산에 대한 이모저모를 모를 수가 없었다.내게 ‘부산’을 들려준 사람은 내 아버지를 비롯하여 노래 부르기 좋아하는 동네
윤석현 씨가 안양시에서 ‘성우사’라는 전당포를 개업한 지 반 년여가 지났을 무렵의 어느 날, 한 주부가 아이를 업고 전당포를 찾아왔다. 등에 업힌 아이의 울음소리가 유난스러웠다. 여인이 한 손으로는 포대기를 추켜 아이를 어르면서, 다른 손으로 주머니를 뒤지더니 여성용 손목시계를 꺼내 창구로 들이밀었다. 여인의 목소리가 매우 작고 희미했다.-이거 맡길 테니까 얼마가 됐든 좀 주시면….시계를 받아들었던 윤석현이 요리조리 살펴보더니 아주 잠깐 만에 판정을 내렸다.-아이고 이거, 태엽 감는 손잡이도 저절로 빠지고…너무 낡아서 잡아드릴 수
개업을 하고나서 두어 달이 지나자 ‘삼원사’ 전당포에 제법 손님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제 주인은 전당포의 운영에 관한 전권을 윤석현에게 맡기고는 며칠 만에 한 번씩만 들렀기 때문에, 그가 온전히 주인노릇을 하게 되었다.-어서 오세요. 무얼 도와드릴까요?-갑자기 친척이 상을 당했는데 돈이 한 푼도 없어서…여기 이 라디오 좀 잡힙시다.-어디, 소리는 제대로 나는지 봅시다.-소리야 항상 낭랑하게 잘 나오지. 거봐요, 틀자마자 하춘화 노래 나오는 거. ‘짝을 지어 놀던 임은 어디로 떠났기에 외로이 서서…’ 아이고, 당숙 돌아가시고 우리
어느 날 전당포에 전화가 걸려 와서 주인이 받았더니 한 취객이 혀 꼬부라진 소리로 “아저씨, 내 시계를 거기다 맡겨놨는데, 가서 보고 대답 좀 해줘요. 지금 몇 시예요?”하고 묻더라는…그런 우스개가 유행했을 정도로 60~70년대에 서민들이 전당포에 갖고 온 물품 중에는 손목시계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 시절에 전당포에서 일했던 윤석현 씨의 증언에 따르면 그러하다. 가락지(반지)가 그 다음쯤 되었다.하지만 시계나 가락지가 ‘비교적’ 많았다는 얘기고, 돈으로 바꿀 수 있는 거의 모든 물품들이 전당포 창고에 줄줄이 들어와 쌓였다.“월남전
1971년 여름, 서울 종로4가 세운상가 근방의 한 전당포.갓 군복무를 마치고 나온 청년 윤석현이 용돈이라도 벌겠다고 들어간 곳은, 먼 친척 노인이 주인으로 있던 전당포였다. 전당포 견습 직원으로 들어간 사람이면 누구나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당연히 ‘시계공부’였다.-시계를 알면 전당포 공부는 다 한 셈이지. 20년 넘게 전당포를 한 나도 잘 몰라서 가끔 실수를 한다니까. 우선 종류부터 익혀야 하는데…이 시계 상표가 뭐지?-아이고, 이건 워낙 유명한 시계니까 알지요. 롤렉스요.-자, 그럼 어디 살펴봐라. 언제 나온 제품이지?-글쎄
내가 ‘고객으로서’ 전당포를 찾은 회수는 딱 네 번이었다. 모두 혈기 방장하던 1970년대에 있었던 일인데 세 번은 싸구려 손목시계를 들고, 나머지 한 번은 역시 싸구려인 카메라를 들고였다. 세세한 사연 따윈 떠올리고 말고 할 것도 없다. 푼돈이 필요해서 갔을 터이므로.2001년 여름에 다섯 번째로 찾은 전당포는 경기도 안양에 있던 ‘성우사’라는 곳이었다. 이번엔 ‘급전을 땡기러’가 아니라 30년 경력의 그 전당포 주인한테서 옛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였다. 전당포 창구 앞에 서자 주인 윤석현 씨가 대뜸 물었다.“70년대에 전당포를 이
여자가 장롱 서랍을 여닫으며 무엇인가를 찾는다. 없다.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어째 없을까? 시집 올 때 해왔던 모본단 저고리가 하나 남아 있었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남편은 묵묵히 책만 들여다보고 있다. 현진건의 단편소설 의 도입부 풍경이 이러하다. 그 작품은 바로 이 남편의 시점에서 서술하고 있는 1인칭 소설인데, 앞부분 일부를 인용하면 이렇다.…나는 그만 묵묵하였다. 아내가 그것을 찾아 무엇을 하려는지 앎이라. 오늘 밤에 옆집 할멈을 시켜 잡히려 하는 것이다. 2년 동안에 돈 한 푼 나는 데 없고, 그대로 주리면 시장
서울의 남부지역을 관할하는 즉결 재판소는 영등포구 문래동에 있었다. 아침이 되면 각 경찰서로부터 실려 온 통금 위반자들로 재판 대기실은 금세 북새통을 이뤘다. 장발단속에 걸린 사람, 폭력을 휘두르다 잡혀온 사람, 유언비어 유포 혐의자 등 여타의 경범죄 위반자들도 함께였다.1970년대 중반의 어느 여름 날, 경상도 상주 출신 총각 윤춘일과 송준식이, 공장 일을 마치고 오랜만에 만나 소주잔을 기울인 것까지는 좋았는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마셔대다가 그만 통금 위반으로 적발되고 말았다. 어쩔 수 없이 다른 위반자들과 함께 경찰버스에 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