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많은 시간이 흘렀다. 전농 창립20년 맞아 그간 전농의 발자취를 뒤돌아보고 새로운 농민운동의 전망을 밝히기 위해 전농20년사 편찬을 결정했다. 집필진 모두 농사를 지으면서 글을 쓴다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산고 끝에 3년이 지나서야 책을 발간했다. 비록 피치 못해 늦어진 일이지만 전농20년사를 기다린 전농의 회원들에게 송구할 뿐이다. 1990년 4월 전국 단일 농민조직으로서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의 출범은 농민운동진영 뿐 아닌 전체 민중민주운동진영의 의미 있는 출범이었다. 1987년 민주화운동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역사 주체로서의 자각으로 시작한 농민운동 단일 전국조직 건설은 노동자들의 전국조직인 전노협과 함께 사회변혁의 주체로서 당당히 서 있음을 선언하는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참 많은 시간이 흘렀다. 전농 창립20년 맞아 그간 전농의 발자취를 뒤돌아보고 새로운 농민운동의 전망을 밝히기 위해 전농20년사 편찬을 결정했다. 집필진 모두 농사를 지으면서 글을 쓴다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산고 끝에 3년이 지나서야 책을 발간했다. 비록 피치 못해 늦어진 일이지만 전농20년사를 기다린 전농의 회원들에게 송구할 뿐이다. 1990년 4월 전국 단일 농민조직으로서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의 출범은 농민운동진영 뿐 아닌 전체 민중민주운동진영의 의미 있는 출범이었다. 1987년 민주화운동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역사 주체로서의 자각으로 시작한 농민운동 단일 전국조직 건설은 노동자들의 전국조직인 전노협과 함께 사회변혁의 주체로서 당당히 서 있음을 선언하는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봉건국가
박근혜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이었던 지난해 1월 19일 서울 화곡동에서 열린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 대선후보 초청 농정 대토론회에 참석해 “영농비 절감을 위해, 농기계 임대사업소를 현 250여개인 2015년까지 400개로 확대 하겠다”고 약속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외에도 △2013년부터 모든 일선 농협에 농기계사업단 설치 △농작업 대행 면적의 지속적 확대 등의 공약을 내세웠다. 평소 고가의 농기계 값으로 농기계를 구비하지 못했거나 구비했더라도 농기계에 딸려오는 큰 몸집의 부채가 부담스러웠던 농민들에겐 두 손 들어 환영할만한 공약이다. 그러나 최근 박근혜 정부가 4대 중증질환·기초노령연금 등 주요 공약에 대한 뒤집기 논란에 휩싸여 그 공(公)약이 공(空)이 될까 불안해하는 농민들도
“생각보다 어렵네요. 마음대로 기계가 안 움직여요.” 지난 19일 한국농수산대학교의 농기계 실습장에서 중년의 남자들이 농기계와 씨름을 하고 있었다. 농기계에 올라 타보기도 하고, 서로 모르는 것을 물어가며 농기계 공부에 한창인 이들은 제대를 앞둔 군인들이다. 평균나이 57세로 군생활을 30년 이상 해오다가 제대를 1년 남짓 앞두고 농촌진흥청의 ‘제대 예정군인 귀농 교육’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날 교육은 ‘농기계 취급조작 및 실습’이다. 그동안 눈으로 보기만 했던 농기계에 대해 이론교을 배우고, 곧바로 운동장으로 나와 실습을 해보지만 마음처럼 기계가 작동하지 않는다. 한국농수산대학 강지원 교수로부터 조작법 설명을 듣고, 부지런히 수첩에 적어둔다. 제대를 앞두고 귀농·귀촌을 통
농촌진흥청은 1993년부터 2012년까지 국립축산과학원에서 개발한 축산기술들을 현장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관련기술을 한 장의 디스크(DVD)에 담아 각 시·군 농업기술센터에 보급한다. 이번에 보급하는 영농활용자료 모음집에 수록된 기술들은 총 2,217건으로 축종 및 분야별로 한우 375건, 돼지 347건, 가금류 319건, 초지 사료 307건, 젖소 280건 등 축산농가에서 필요로 하는 실제 기술을 담았다. 또한 연도, 축종, 제안자, 제목별로 자료를 분류해 놓았으며 검색어 입력을 통해 내 농가에 필요한 기술과 문제점 해결 방안을 찾아 해결할 수 있다. 농진청 국립축산과학원 진현주 연구사는 “새로운 기술을 계속해서 개발하고 보급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까지 개발된 기술 중 각 농장에 맞는 기술을 찾아
1990년대 초반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는 여름농활을 강원도로 갔을 때 일이다. 강원도는 농지가 그리 넉넉한 편이 못되니 당연히 농민들의 살림살이 역시 그다지 넉넉지 못한데도 일하러 가는 집집마다 꼭 닭을 삶아 주었다. 왜 이렇게 닭이 흔하냐고 했더니 당시 농민들 말씀이 정부에서 농업경쟁력을 키우기 위한 방안으로 강원도 땅은 닭을 키우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집집마다 닭이 많았고 그저 형편없는 솜씨나마 돕겠다고 온 대학생들에게 기꺼이 그 닭을 한 마리씩 잡아주었다. 마지막 떠나는 날엔 누군가 산 닭 한 마리를 선물로 주면서 돌아가서 잡아먹으라고 하는 바람에 난감했던 기억도 있다. 그랬다. 당시는 우루과이라운드로 인한 농산물수입개방으로 인한 피해에 대한 우려가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때였다. 정부는 수
농사경력 17년. 소를 키우면서 논농사와 배추, 오이농사까지 짓는 최성식(44세·충남 아산시 배방읍 회룡리) 씨는 젊은 사람들이 욕심내지 않고 땀 흘리는 보람과 수확의 기쁨을 누리고 싶다면 농민으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말한다. 그는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무엇이 그를 한걸음에 고향으로 달려가게 했을까? 농촌의 여느 부모가 그렇듯이 서울에서 대학까지 마친 그가 농사를 짓겠다고 했을 때 부모님의 반대는 거셌다. 결국 그의 고집을 꺾지 못했고, 지금은 그가 짓고 있는 농사의 일등 공신이 되어 도움을 주고 있다. “처음 논농사 지을 때 어려움은 없었어요. 모르는 게 약이라고 젊은 것 하나 믿고 그저 열심히 했죠. 농사짓는 게 재미도 있었어요. 여러 사람과 같
11월 9일! 수능 때문에 8일날 진행하기로 한 야적투쟁을 9일로 하루 미뤘다. 야적투쟁 중 계획 되어 있던 11시30분 아산시청 앞 기자회견을 취소하고 오늘의 주인공인 벼를 쌓는데 하루 종일 보냈다. 우리 동네형들 모두 다 같은 심정일거라는 생각에 그저 묵묵히 톤백 줄을 지게차에 메면서 그렇게 벼를 쌓았다. 기자들은 좋은 사진을 만들려고 이리 찍고 저리 찍고 왜 기자회견은 안하냐며 질문도 하고 회장님이 야적 벼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야 한다니 뭐니 하면서 마치 장날처럼 시끌벅적 했다. 지게차의 후진소리에 삐~삐~삣! 소리가 나고, 터진 톤백 자루를 청테이프로 막으면서 쏟아진 벼를 주워 담기도 하면서 야적투쟁을 했다. 어떤 기자가 “총무부장님!” 하고 부르면서 “왜 해마다 같은 일을 되풀이
지난 7일 춘천에서 ‘청년, 농사를 이야기하다’라는 주제로 오픈컨퍼런스가 개최됐다. 참석자들은 청년과 농사라는 주제를 가지고 주제발표와 토론을 진행했다. 주제발표는 농활에서 ‘농사로-대학생 농부되기 프로젝트, 우리는 왜 농사를 이야기 하는가, 청년 농사를 짓다’ 라는 내용으로 했다. 이후 진행된 토론에서 농사에 대한 생각을 나누었다. 참석자들은 토론을 통해 청년과 농사의 관계를 고민하고, 가치를 확산할 수 있는 방법을 논의했다.
나는 원래 도시여자였다. 외모만 봐서는 잘 모르겠지만 나고 자란 24년 동안 흔한 친척 한 분 시골에 살지 않아 농활 때 외에는 촌에 가본 적도 없는. 그런 내가 해남 6년, 화순 6개월을 거쳐 경북 상주에서 9년째 농촌에서 살고 있다. 물론 해의 움직임에 따라 하루를 열고 닫고 직접 손에 흙 묻혀가며 일하는 순도 100% 농사꾼은 아니지만 편리한 생활문명과 다양한 문화생활을 누리고 사는 도시인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것은 대학 4년 동안 150도쯤 변해버린 내 가치관에 따라 생계유지에도 충실한 직장이면서 모두가 더불어 인간답게 사는 사회에 일조하는 지향을 가진 농민약국에서 활동하게 되어서이다. 처음엔 모든 것이 낯설고 힘들었다. 하지만 시골어르신들을 만나는 일은 어렵지도 힘들지도 않았다. 약국의 대표지
경남 고성군 마암면 두호리. 이 마을은 우리 농민운동사에 특별하게 기록된 곳이다. 갑오농민전쟁 이후 가장 크게 농민들이 일어났던 80년대 소몰이 투쟁에서 그 첫 번째 싸움이 일어난 곳이기 때문이다. 88년의 추곡수매거부운동이 일어난 곳 역시 두호마을이다. 80여 가구, 성산 이 씨가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는 마을에서 우리밀살리기운동이 시작되기도 했다. 오랜 역사를 지닌 마을은 들어서면서부터 강한 인상이었다. 마을 입구에 작은 동산이 있는데 수백 그루의 소나무와 팽나무, 느티나무 등이 들어서 있었다. 숲의 이름은 민주동산이다. 시골 마을의 동산에 ‘민주’라는 이름을 단 곳을 과문한 나는 처음 보았다. 옛 농협 창고의 담벼락에는 각종 구호가 쓰여 있었다. 아마 농활을 왔던 대학생들이 써 놓은 듯, ‘통일
나의 농활 이야기 같은 농활대의 대원이라도 농활을 가기 위해 준비하는 건 각자 다를 것 입니다.저의 경우에는, 농활을 가기 위해서 우선 어머니를 끈질기게 설득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한 번도 어머니를 설득한 뒤 농활에 가본 적은 없습니다. 그래서 늘 농활 첫날밤은 집으로부터 온 전화에 눈물을 쏟는 것이 일이었습니다. “한 번이면 됐지 이번이 몇 번째냐, 나는 네가 남들처럼 전공 공부하고 스펙 쌓고 취업 준비하기도 바쁜 시기에 열흘씩이나 남의 집 가서 일해주고 오는 게 싫다.” 어머니의 이런 잔소리도 힘들었지만, 평소에도 별 잔소리 없으시고 통화도 자주 안 하던 아버지께서 “그럴 거면 집에나 와서 일 좀 해라, 시골서 농사지으며 살게 안 하려고 멀리까지 보내서 가르쳤는데…….” 라고 하시는 것이 더 힘들었
잡초가 무성했다. “밀림을 헤치러 한 번 가볼까”라고 툭 던진 말이 실감났다. 사람 키만큼 훌쩍 자란 잡초는 성벽을 이루듯 고추를 재배하는 하우스 3동을 둘러싸고 있었다. 예초기에 시동을 걸었다. ‘부르르르’ 엔진의 떨림이 손끝에 전해지자 예초기의 날카로운 칼날이 무한 회전하기 시작했다. 칼날이 스치는 순간 무성한 잡초가 꺾이고 하우스로 향하는 길이 열렸다. 창업농 자금을 지원받아 구입한 1천800평의 땅에는 빨갛게 잘 익은 고추가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땅의 주인, 이예열(45, 강원도 춘천시 사북면)씨는 예초기를 돌리며 “최근 며칠간 신경을 쓰지 못해서 그렇다”며 멋쩍게 웃었다. 이씨가 하우스 주변을 정리하는 사이, 아내인 심민아(41)씨는 잘 익은 고추를 따기 시작했다.
농활 하루 전날,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것은 집으로 곧 도착할 성적표에 대한 불안함도 아니었으며, 대학생활의 첫 방학을 어떻게 보낼까 하는 기대도 아니었다. 단지, 어딘가로 9박 10일간 떠난다는 그 사실이 나를 들뜨게 했다. 대한민국 국토의 정중앙 강원도 양구에 도착했다. 사방이 산이었고 마을은 조용했다. 대한민국 땅에 내가 사는 곳과 너무 다른 이곳은 낯설지만, 한편으론 너무나도 정겨웠다. 양구의 밤하늘이 아름답다는 것을 들은 나는 첫날 저녁 옥상으로 올라가 하늘을 보았다. 아쉽게도 구름이 껴서 별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9박 10일 동안 하루정도는 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으나 일정 내내 밤하늘은 구름이 가렸고 쏟아질 것 같은 별천지의 밤하늘은 결국 보지 못했다. 정말 아쉬웠던 점이다.
농활수기 심사평 글로 자신의 생각을 나타내는 일이 쉽지 만은 않은 일이다. 세상엔 활자물들이 넘쳐나지만 그중에서 사람의 마음을 울려주는 글은 많지 않다. 알량한 글재주를 뽐내며 이야기들을 지어 내지만 한낮 글자의 공해가 되어 사람의 눈을 어지럽히는게 다반사다. 이번 농활수기공모에 많은 학생들이 참가해 주었다. 참으로 고맙다. 농활하기에도 지친 상태에서 정신을 가다듬고 글을 쓴다는게 얼마나 고역인지 미뤄 짐작이 된다. 대부분 농활을 함께 하게 된 동기 그리고 농활 상황들을 담담하게 글로 표현해주었다. 응모한 글들을 읽으며 내가 경험한 것과 차이가 없음을 느끼면서 또 다른 면에 큰 차이가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만큼 세월의 간극이 큰 탓인가 보다. 이번에 선정한 글들은 수기로서의 갖춤이 뛰어나거나
한중FTA 2차 협상이 열린 지난 3일. 서울 도심 한복판에는 곡소리가 울려 퍼졌다. 올해 농어민에게 ‘사형선고’라는 한미FTA가 발효된 데 이어, ‘사형집행’이라는 한중FTA 2차 협상이 농어민의 강력한 반발에도 강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중FTA중단 농수축산 비상대책위(상임대표 이준동, 김준봉)는 한중FTA중단 전국농어민결의대회를 서울시청 광장에서 열고는 “한미FTA의 몇 배에 달하는 막대한 농어업 피해가 예상됨에도 한중FTA 협상 강행은 중국산 저질농수산물 수입에 따른 국민건강권 위협과 농어업계를 말살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며 강력하게 반발했다. 이날 결의대회에 참가한 농어민 1만5,000여명은 “농어업인의 목숨을 담보하는 한중FTA, 농어업인의 한 맺힌 목소리가 들리지 않느냐”며 한중FTA
정부가 3일부터 5일까지 제주도에서 한중FTA 2차 협상을 진행한다고 밝힌 가운데, 농민단체들의 반발이 거세게 일고 있다. 전국농민회총연맹(의장 이광석) 소속의 각 도연맹은 도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한중FTA 협상 중단을 촉구했다. 전북도연맹(의장 하연호)은 지난달 28일 전북도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한중FTA 중단을 촉구했다. 전북도연맹은 “중국의 농업이 우리의 작부체계와 유사하지만 생산비는 우리의 20~30% 밖에 되지 않으며 지리적으로 매우 가까우므로 신선채소와 과일류까지 심각한 타격을 줄 것” 이라며 한중FTA에 대한 우려를 나타냈다. 또한 전북도연맹은 “민감품목인 농산물을 5년 혹은 10년을 유예한들 그 이후 농민의 생존권과 식량주권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아무 것도 없다”며 “농민이
‘춘천 농민한우’는 질 좋은 한우를 저렴하게 공급하면서 성업중이다. 지난 어버이날에는 주말 고객의 두배가 넘는 인원이 찾아와 춘천 농민한우에서 효도를 하고 갔다. 이곳의 대표가 전농 강원도연맹 전기환 의장이다.올해부터 강원 농민운동을 대표하게 된 전 의장은 아침 일곱시 한우 농민으로 시작해 한우정육식당 대표로, 농민단체장으로, 지역 농정에 현장 농민들의 목소리를 전하며 분주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농민운동이 현장과 더 밀접해지려면, 품목조직이 꼭 필요하다”는 전 의장은 그에 대한 계획도 세우고 있다. 전 의장은 ‘농민운동가 부부’이기도 하다. 부인은 전여농 전 사무총장인 최옥주 씨다.-지난 2월 전농 강원도연맹 신임 의장에 선출된 이후 어떻게 보냈는지 궁금하다.다른 도연맹 의장님들에 비해
어린나이에 소년원을 다녀와 삶의 바닥을 본 그는 “‘평범’이하의 삶을 살았다”고 회고했다. 인생에 대한 모멸감, 외로움, 소외감에 낙인찍힌 그는 어떻게든 다른 삶을 살기 위해 건설노동자, 이른바 ‘노가대’를 선택하기도 했다.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글로 알려내기 위해 구로노동자문학회에 들어간 그는 노동자들의 애환과 비극을 글로, 시로 세상에 알려냈다. 멕시코 칸쿤에서 이경해 열사의 죽음을 ‘목격’한 그는 이후 농민운동의 순수함과 열정에 이끌려 전국농민회총연맹과도 다양한 문화예술사업을 펼치기도 했다. 그 인연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농민, 농업, 농촌에 대한 끝없는 애정을 보이고 있는 송 시인을 지난 6일 서울 녹색병원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한도숙=전농과 사업을 많이 했
농촌이 좋아 학교를 졸업한 다음날 도시를 떠난 부부가 있다. 무엇이 이들을 농촌으로 이끌었을까? 사람들은 농사가 싫다고 농촌을 떠나는데 오히려 이들 부부는 전북 정읍으로 귀농을 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지금은 논과 밭, 소까지 키우는 농민운동이 올해로 23년째인 박연희 시의원(통합진보당 정읍)을 정읍시 의원회관에서 만나 인터뷰했다.-오랫동안 농민운동을 한 활동가로서, 가정주부로서 직접 의회에 참여하는 정치인의 삶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현실정치에 참여하게 된 계기는 어떠한가?정읍에 뿌리를 내리고 산지 20년이 지났다. 서울이 고향인데 농과대에 진학하고, 농촌동아리 활동과 농활을 통해 자연스레 농민을 이해하게 됐고, 농사를 지으며 농민들과 어울려 사는 꿈을 꿈꿨는데 소원이 이뤄진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