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사당의 우두머리인 꼭두쇠가 보좌관 격인 곰뱅이쇠를 거느리고 마을 안으로 들어간 지도 한참이 지났다. 동네 들머리에 널브러지다시피 모여 앉은 단원들의 낯빛에 피로와 배고픔과 세상살이의 고단함이 역력하다. 벌써 마을을 두 군데나 공치고 지나왔으니….그 때 누군가가 “붉은 기다! 붉은 깃발이 올랐어!”를 외쳤고, 그 소리에 너나없이 날 밟힌 괭이자루처럼 발딱 일어나 마을 쪽으로 눈길을 향한다. 멀리서 곰뱅이쇠가 붉은 깃발을 힘차게 흔들어 보인다.-허허허, 굶어 죽으라는 법은 없구먼. 자, 모두 일어나 들당굿을 한바탕 쳐보더라고!농악대
남사당패의 단원은 무동춤을 추는 아이들까지를 합해서 많을 때는 50여 명에 이르렀다. 얻어먹는 처지이다 보니 하루 세 끼를 찾아먹는 것은 엄두를 낼 수 없었으나, 그 단원들을 적어도 굶겨 죽이지 않을 책임을 진 사람이 바로 남사당패의 우두머리인 꼭두쇠였다.남사당의 식구들이 마을 어귀에 이르렀다. 그 전 마을에서 한 번 허탕을 친 뒤에 고개 넘어 찾아온 동네인지라, 이번엔 어떻게든 일이 잘 되어서 주린 배를 채워야 했다.-아이고 배고파 죽겠네. 이 동네 또 허탕 치는 것 아녀?-재수 없는 소리 말더라고. 아이고, 다리야.지친 단원들이
여름, 서산너머로 노을 스러지고 저녁 밥상도 치웠으니 이젠 마당에 거적 깔고 앉아 옛날 얘기나 할 시각이다. 먼 데서 뉘 집 개 짖는 소리나 이따금 들려올까 말까 하던 고즈넉한 농촌마을의 저녁이, 그러나 오늘은 다르다.꽹과리, 징 소리가 쩌렁쩌렁 우실 팽나무 숲에 부딪쳐 온 동네에 메아리로 퍼진다. 노인 아이 할 것 없이 소리 나는 쪽으로 몰려가느라 어스름 고샅길이 예사롭잖게 시끄럽다. 영문 모르는 한 아낙이 싸리문 밖으로 고개를 내민다.-어디로 그렇게들 몰려가는 것이여? 무슨 구경거리래도 생겼어? 저 매구 소리는 또 뭣이고?-아니
평화시장 헌책방에, 교과서나 참고서를 팔고 사려는 학생들만 찾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대학교수나 서지학자, 그리고 옛날문헌에 눈이 밝은 인사동 고서점 주인들도 틈나는 대로 그 책방거리로 발품을 팔았다. 그들은 찾는 책을 미리 정해두고서 서점에 들르는 게 아니라 혹시 뭔가 ‘물건’이 될 만한 것이 있나, 둘러보러 나온다는 점에서 학생 고객들과 차이가 났다.반백의 역사학 전공 교수가 양지서림으로 들어선다.-교수님, 오늘은 뭘 좀 찾으셨어요?-아, 저 쪽 제일서점에 갔다가 일제 초기 의병활동에 관련된 서책 하나를 건졌어요.-잠깐만요, 저도
1970년대의 평화시장 헌책방들은 말이 책방이지 고물상 취급을 받았다. 따라서 책방의 영업 허가를 경찰서에서 받아야 했고, 누군가가 훔친 책을 구입했을 경우 책방 주인에게 장물취득 혐의가 들씌워져서 경찰의 조사를 받은 뒤, 적잖은 벌금을 물어야 했다.관할 경찰서에서는 헌책방마다 도서구입 장부를 비치하게 하고 언제, 어디 사는 누구로부터, 어떤 책을 샀는지를 일일이 기록하도록 지도했다. 특히 제법 값이 나가는 대학교재의 경우, 장부에 기록하지 않은 채 진열대에 꽂아두었다가 발각되는 날에는, 책방주인은 여지없이 장물아비 취급을 당해야
1990년대 중반의 어느 여름날, 한 중년 부인이 중학생 아들의 손을 잡고 ‘양지서림’을 찾아왔다. 그런데 책을 사러 온 게 아니라 서점주인 성세제를 만나러 왔노라 했다.-누구…시더라…아, 이십 몇 년 전에 야학에서 애들 가르치던 그 대학생?-알아보시네요! 애 옷 사러 평화시장에 나왔다가 양지서림 간판이 보여서 혹시나 해서 들렀는데…어이구, 아저씨도 이젠 좀 늙으셨네요. 아, 참 그때 제가 책값 떼먹은 거 있지요?-며칠 뒤에 와서 다 갚았잖아.-아녜요. 4,000원만 내고 나머지 8,000원은 다음에 준다 하고서 못 갚았잖아요.-무
평화시장 책방 거리의 서점 주인들은, 각 점포에 헌책을 공급하는 사람들을 ‘중간상인’이라 일컬었다. 그들이 중간상인이라면 그 전 단계에 헌책을 수집하는 사람이 따로 존재한다는 얘기가 된다.“넝마주이나 고물행상들이 돌아다니면서 폐지를 주워다 변두리 고물상에 넘길 것 아녜요. 그러면 그 근방의 헌책 수집원이 고물상에 가서는 폐지 값을 주고서(아예 근으로 달아서) 책들을 사다가 그냥 쌓아둔단 말입니다. 그 쌓아두는 수집소도 ‘서점’이라는 간판을 달고는 있었어요. 대표적으로 연신내 시장 통에 있었던 ‘문화서점’을 들 수 있지요. 하지만 말
‘양지서림’ 주인 성세제가 아침에 잠을 깬 곳은 서점 다락이었다. 청계천 평화시장 바깥쪽 도로변으로 다닥다닥 늘어선 두 평짜리 책방들에는 저마다 높다란 사다리 하나씩이 놓여 있었는데, 그 사다리는 높은 곳에 꽂혀있는 책을 꺼내는 데에만 쓰였던 게 아니라, 책방 주인들의 거처인 다락을 오르내리는 통로이기도 했다.“서점마다 천장 밑에 다락을 만들어놓고, 집이 없는 서점 주인이나 혹은 점원으로 고용된 종업원들이 거기서 생활을 했어요. 나도 시골에서 막 상경해서 형편이 뻔했는데 어디 가서 돈 내고 하숙을 할 수는 없잖아요. 베니어판 깔린
1971년 가을, 스물다섯 살 청년 성세제가 청계천 헌책방 거리에 있는 ‘양지서림’의 새 주인이 되었다. 그가 원 주인이던 윤씨 할아버지로부터 인수절차를 마치고 장사를 배우던 날, 서점을 찾은 첫 손님은 까까머리 중학생이었다.- 중3 도덕 교과서 있어요?- 그래. 중3 도덕책 여기 있다. 500원 내라.헌책 장사에, 아니 서울생활 자체에 생판 풋내기였던 성세제는, 학교에서 보급하는 교과서를 왜 헌책방으로 사러 오는지부터 궁금했다. 그래서 헌책방에서 교과서도 파느냐고 물었다가, 호되게 지청구를 들었다.- 아이들이 교과서를 안 사러 오
내가 1970년대 초부터 꽤나 발 도장을 찍고 돌아다녔던 청계천 헌책방 거리를 취재하겠다고 나선 때는, 그로부터 30여 년을 훌쩍 건너뛴 2001년 3월이었다. 종로6가에서 청계천6가로 건너가면 만나게 되는 평화시장 들머리, 예전엔 그 곳이 헌책방 거리의 시작점이었는데, 예상대로 책방들은 자취를 감추고 그 자리를 옷가게들이 차지하고 있었다.“아, 평화시장은 옷 파는 패션시장인데 여기 와서 뭔 놈의 책방을 찾아? 저 아래 쪽으로 죽 내려가 보슈. 거긴 아직도 책 쌓아놓고 파는 가게들이 있는 것 같더구먼.”작은 희망을 붙들고 옷가게 주
1970년대 중반의 어느 주말 오후, 서울 청계천 6가의 평화시장 앞.하천 복개도로와 그 위 공중으로 뻗어있는 고가도로로는 자동차들이 소음을 뿌리며 부단히 왕래한다. 복개천변을 따라 길게 늘어선 시장건물 1층으로는, 고만고만한 작은 책방들의 행렬이 아득하다. 남자 중학생이 서점으로 들어선다.-아저씨, 중학교 2학년 국어 책 있어요? 아, 여기도 없다고요? (바로 옆 서점으로 가서) 아저씨, 중학교 2학년 국어 책을 잃어버려서 헌책 사려고 그러는데요…에이, 참, 큰일 났네, (다시 그 옆 서점으로 들어서며) 아저씨, 중학교 2학년 국
재물을 늘리기 위한 목적으로 조직한 식리계(殖利契) 중에서, 낙찰계보다 더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 계가 바로 ‘번호계’(일명 순번계)였다. 번호계는 얼핏 들으면 그 운영방식이 매우 간단한 것 같은데, 듣고 나면 또 상당히 복잡하다.번호계는 처음부터 아예 순번이 정해져 있었다. 애당초 계주가 번호를 정해놓고 사람들에게 순번을 부여하거나, 혹은 첫 모임에서 제비를 뽑아서 순번을 정하기도 한다. 물론 사정이 급한 사람일수록 앞 순번을 받으려고 하는데, 먼저 탄 사람은 매월 내야 할 곗돈에다 이자를 많이 얹어서 내야 한다.반면에 뒤쪽 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