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박봉자! 너 낼 막차 탄다고 했지? 이 언니가 좋은 걸 가르쳐 줄게. 자, 종이에다 표시를 하자면, 여기가 증평 종점이고, 이렇게 청주 쪽으로 죽 오다 보면 말이야…여기쯤에 저수지가 있고, 이쪽에 고갯길이 있잖아?”“아, 초평 저수지 보이는 그 고갯길 말이지? 그런데 뭐가 어떻다고?”“몇 년 전에 우리 회사 차장이 밤중에 막차 타고 거기를 지나오는데…분명히 차안에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거든. 그래서 자리에 앉아 동전을 꺼내놓고 세고 있는데…어떤 여자가 등 뒤에서 ‘거스름 돈 내놔!’ 그러더래. 딱 돌아보니까 소복 입은 처녀가
“어이, 차장 아가씨, 이 소쿠리 좀 받아 올려 줘.” “아이고 아줌마, 이건 화물차가 아니고 버스예요, 버스.” “아, 오늘이 증평 장날 아녀. 콩도 팔고 찹쌀도 내다 팔고, 씨암탉 한 마리도 팔아야 추석을 쇨 것 아닌감.” “그런데 아저씨, 그 염소를 버스에 태울라고요?” “미안해요 차장 아가씨. 여그서 장터까장 끌고 갈 수도 없고, 염소 한 마리 싣자고 화물트럭을 빌릴 수도 없는 노릇 아녀.” “안 되는데…버스 바닥에다 똥 싼단 말이에요.” “똥 싸면 내가 책임질게.”1970년대 중반, 충청도 청주에 적을 둔 시내버스의 어느
“운행을 마치고 기숙사에서 모두 잠에 떨어져 있었는데, 사감이 들이닥쳐서는 차장들을 모두 깨우더니, 옷을 전부 벗으라는 거예요. 브래지어까지 모두 다요. 언니들이 항의를 했지만 통하지 않았어요. 난 무서워서 덜덜 떨고만 있었지요. 그런데, 소지품 검사 결과 한 언니한테서 감춰뒀던 2만원이 나왔어요. 몸수색을 항의했던 다른 차장들이 할 말이 없어져버린 것이죠. 며칠 전부터 아버지 수술비 때문에 걱정을 달고 지내던 언니였는데…결국 쫓겨났지요.”1970년대 말에 지방도시인 청주에서 버스차장으로 일했던 박봉자 씨의 얘기다.버스회사 측의 차
1978년, 충청도 괴산 출신의 열일곱 살 박봉숙이 청주의 한 시내버스 회사에 차장(안내양)으로 취직을 했다. 옷가방을 품에 안고 주춤주춤 기숙사에 들어갔는데, 다음 날 아침부터 그녀의 차장 수습(修習)을 지도할 선참 차장이 이렇게 말하더란다.“앞으로 차장 노릇 잘 하려면, 반드시 외우고 씩씩하게 실천해야 할 규칙이 있다.”박봉숙은 당연히 무슨 근무규정이나 아니면 버스 노선의 정류장 이름을 외워야 한다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날 저녁에 선참 차장 조춘희와 수습 차장 박봉숙이, 기숙사 천장이 쩡쩡 울리도록 선창과 복창으로 외
1970년대 초에 상경하여 처음 서울의 시내버스 차장을 보았다. 파란 유니폼을 산뜻하게 차려 입고 ‘오라이, 스톱!’을 외치는 그 모습은 촌놈인 내 눈엔 썩 멋져 보였다. 투박하고 우중충한 시골 버스의 남자 차장과는 견줄 바가 아니었다. 역시 서울은 서울이었다.그러나 사춘기적 나의 가슴을 설레게까지 했던 처음의 그 모습이 버스 차장의 모두는 아니었다. 출입문 바로 옆의 전용 좌석마저 승객에게 빼앗기고, ‘오라이’와 ‘스톱’ 사이의 그 짧은 시간을 못 참아 문짝에 기대 꾸벅꾸벅 졸고 있는 지친 모습을 보았을 때, 문이 닫히지 않을 정
1972년에 남과 북에서 동시에 발표된 은 5분 드라마 에도 큰 변화를 요구했다. 무엇보다 공동성명 안에 「상대방에 대한 중상과 비방을 금한다」는 조항이 포함돼 있었던 것이다. 날이면 날마다 북녘의 권부와 체제에 대한 ‘중상과 비방’으로 먹고 살아온(?) 터에 그것을 하지 말라니, 이제 어찌 할 것인가?더구나 직후엔 이런 일도 있었다. 당시 김삿갓 역을 맡아 연기했던 성우 김현직의 회고담을 들어보자.“하루는 녹음을 하려고 모두 스튜디오에 모여 있었는데 중앙정보부에서 파견한 우
에서 주인공 김삿갓은 거의 매일 북한의 최고 지도자를 향해 거의 욕설에 가까운 비난을 퍼부었다. 프로그램이 처음 시작될 때 시그널과 함께 흘러나오는 ‘땅 덩어리 변함없되 허리는 동강나고…’라는 시 낭송 말고도 끝날 때에도 그 날의 내용에 맞는 시 한수를 읊었는데, 그것은 시라기보다는 차라리 저주에 가까웠다. 실제로 1987년 2월 16일에 방송했던, 의 마지막 부분은 이러하였다.말로써야 천하성군 누구인들 못 하랴만 / 뻥긋하면 위한다고 지시 교시 떠벌이나 / 치다꺼리 허
김삿갓 방랑기가 처음 전파를 탔던 1960~70년대 당시만 하더라도 남북 간의 교류가 전혀 없었을 뿐 아니라, 북한이 워낙 폐쇄사회였기 때문에 제3국을 통해서 북한의 정보를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 5분극의 작가들은 어디서 무슨 재주로 매일 매일의 이야깃거리를 수집했을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없는 사실을 줄곧 꾸며 쓸 수도 없었을 텐데.KBS 라디오 본부장을 지낸 조원석씨의 얘기는 이러하다.“물론 북한 사회의 이모저모를 알려준 사람들이 있었지요. 남파 간첩이나 귀순자들이었어요. 나중에는 아예 그들을 김삿갓 방랑기의 작가로 등용하기도 했어요. 대표적인 분이 이철주라는 사람이었는데, 이 사람은 김삿갓 방랑기를 1,000회 이상이나 썼어요. 해주에서 고등학교 교장을 하다가 남파 간
내가 라는 프로그램의 탄생배경을 취재했던 때는 2002년 3월이었다. 그 자신이 의 연출경험이 있을 뿐 아니라 라디오 드라마로 잔뼈가 굵은 조원석 KBS라디오 편성 주간(당시)이 들려준 바에 따르면, 이 프로그램은 1964년 봄 개편 때 신설되어서 처음 전파를 탔다.그때는 바야흐로 라디오 드라마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이었다. 그해 4월, 라디오 피디였던 이상만이 색다른 기획안을 들고 올라가서 간부와 나눴다는 얘기는 이러하다.“북한 얘기를 5분짜리 반공 드라마로 만들어 보자는 얘긴데, 드라마로 반공을 얘기한다…?”“국장님, 우리 국민들이 북한의 실정을 너무 모릅니다. 아니, 아예 알려진 것이 없다고 봐야 합니다. 아이들 반공 포스터 그
농부가 집 뒤 켠 텃밭에서 밭갈이를 한다, 아내가 밭머리에 나와서 소리친다.“춘식이 아부지, 쟁기질 그만하고 얼른 집에 와서 점심 잡숴요!”“벌써 점심때가 된 것이여? 김삿갓 방송도 아직 안 했는디?”“오늘 이장이 동네 스피커를 잠가놓고 면사무소에 가는 바람에 김삿갓 방송 안 나온대요!”‘김삿갓 방송’이라니? 사오십 대 이상의 나이든 축이 아니라면 뭔 소린가, 할 것이다.비슷한 시각, 전방부대 연병장의 구령대 뒤쪽 스피커에서 익숙한 ‘눈물 젖은 두만강’ 가락이 흘러나오더니, 역시 귀에 익은 성우의 목소리가 병영을 쩌렁쩌렁 울린다.남자성우 : 땅 덩어리 변함없되 허리는 동강나고 / 하늘빛은 푸르러도 오고가지 못 하누나 / 이 몸 죽어 백 년인데 풍류인심 간 곳
1937년에 개통한 이래 70년대 말까지 수원과 인천을 잇는 교통수단으로서 제 몫을 톡톡히 해냈던 협궤열차는, 8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는 오히려 지역발전의 장애물로 찬밥 취급을 당하게 된다. 수원-인천 간 산업도로가 뚫리고 수도권 전철이 생겨나면서, 협궤열차는 더 이상 지역주민들의 유일한 교통수단이 아니었던 것이다.게다가 인천시에서 남동공단을 조성하는 데에도, 협궤철로가 가장 큰 걸림돌로 등장했다. 드디어 1979년, 송도에서 남인천에 이르는 구간이 폐쇄되었고, 1992년에는 소래에서 송도까지의 협궤철로에서마저 기적소리가 사라졌다.협궤열차의 기관차도 세월 따라 변화를 보였는데, 70년대 중반부터는 석탄이나 벙커씨유로 보일러를 달궈 동력을 얻던 증기기관차가 디젤 기관차로 대체되었다. 디젤
왕년의 협궤열차 기관사 박수광이 기관조사였던 시절로 되돌아가보자. 그 시절 그는 수인선 협궤열차만 탔던 것은 아니었다. 똑같은 협궤열차가 수원과 여주를 잇는 ‘수여선'에도 운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수인선과 수여선을 번갈아 운행 했던 것이다.물론 수여선은 일제가 여주, 이천에서 생산된 쌀을 수탈해가기 위해서 개설한 철로였다. 수원을 출발하여 화성-원천-신갈-용인-양지-제일-오천-이천을 거쳐 여주에 이르는 노선이었다.어느 여름날, 수원에서 여주로 가는 막차를 운행했던 기관사 일행은, 여주의 숙소에서 숙박을 한 다음, 새벽 첫 기차를 몰고 수원을 향해 출발했다. 수인선과는 달리 수여선은 철로가 산간지역으로 뻗어 있었다.그런데, 잘 달리던 기차가 용인의 제일역
남인천 발 협궤열차의 수원 종점을 한 정거장 앞둔 어천역.그러나 이제 다 왔다, 하고 안심할 계제가 아니었다. 경사가 만만치 않은 고갯길이 남아있는 데다 하필 언덕에 200여 미터 길이의 터널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 터널을 ‘어천굴’이라 불렀다. 드디어 기차가 터널로 진입했는데 기관사 박수광은 심상찮은 낌새를 느꼈다.“아침 첫차였는데, 그날따라 군자역에서 소금을 잔뜩 실었어. 아무리 꼬마 열차라 해도 그 정도의 화물적재량쯤은 평지에서야 거뜬했을 텐데, 문제는 일제시대에 뚫은 오래된 터널이라 천장에서 물이 줄줄 새는 관계로, 철로가 아주 미끄러웠거든. 아니나 다를까 터널을 3분의2쯤 지난 지점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 하고 기차가 헛바퀴 질을 하는 거야.”기관실은 삽시간에 벙커씨유
수인선 협궤열차의 제한속도는 시속 50킬로미터였다. 기관 자체가 50킬로미터를 넘으면 안 되도록 설계돼 있었기 때문에 40이나 45킬로미터로 달리는 것이 보통이었다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균시속은 고작 25킬로미터에 불과했다. 어째서 그런 통계수치가 나왔을까? 왕년의 협궤열차 기관사 박수광씨의 얘기를 들어보자.“물을 끓여서 동력을 얻는 증기기관차 시절에는,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기기 무척 어려웠어. 기관사 밑에 기관조사가 두 명 있었는데 그 두 사람은 열차를 운행하는 내내 끊임없이 석탄을 퍼 넣어서 불을 때야 하거든. 중노동이었지. 여름철이면 그 좁은 기관실이 요즘의 맥반석 사우나실 저리 가라 할 만큼 달아올라서 숨이 탁탁 막힐 지경이었다니까.”석탄 넣는 일도 무조건 퍼 넣기만 하면 되
수인선 협궤 철로의 총연장은 52킬로미터였다. 협궤열차의 역들을 수원을 기점으로 짚어보면 ‘수원-고색-어천-야목-사리-일리-고잔-원곡-군자-달월-소래-남동-송도-용현-남인천’ 등으로 이어진다. 기차역마다 승객들이 가지고 타는 물품들이 달랐다. 야목역은 조그만 간이역이었으나 농산물을 팔러 인천으로 가려는 사람들이 몰려서 이용객이 가장 많았다. 보릿자루나 콩자루 등을 가지고 타는 경우 화물운임을 따로 내야 했다. “곡식 자루를 갖고 타면 당연히 화물표를 따로 끊어야 되거든. 그런데 그거 몇 푼 안 내겠다고 보따리를 치마 속에 숨기는 아주머니들이 있어요. 차장이 그걸 모르나? 다 알지. 그렇다고 여자의 치마폭을 들출 수는 없어서 한바탕 실랑이가 벌어지고…허허, 참, 볼만 했어요.”
간이역에 기차가 멈춘 지 십여 분이나 지났다. 차장이 연신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더니 호루라기를 불며, 꾸역꾸역 모여드는 승객들을 재촉한다.“빨리빨리들 타요! 기차 출발할 시각이 5분이나 지났어요! 이봐요, 거기 쌀장수 아줌마, 그 쌀자루는 실을 거요, 말 거요!”“차장 아저씨, 재촉만 말고 이 쌀 자루 싣는 것 좀 거들어 줘!”“에이, 기관사는 빨리 가자고 빵빵거리고 난린데….”하는 수 없이 차장이 내려서 쌀자루 두 개를 거들어 싣는다. 그때 한 할머니가 풋것들을 한 다발 꾸려 이고는 종종걸음으로 달려온다,“아이고 할머니는 웬 풋나무단을 기차에 실으려고요?”“차장 눈에는 이것이 풋나무단으로 뵈남? ‘반짝시장’에 내다 팔려고 밭에서 콩을 좀 뽑았어.”차장
1980년대 들어와서는 전화 통화 체계가 자석식에서 전자식으로 바뀌었고, 전화기도 다이얼식에서 버튼식으로 바뀌게 된다. 또한 전국 광역화 사업을 추진해서 80년대 후반부터는 교환원을 거치지 않고 시외통화를 할 수 있는 DDD(Direct Distance Dialing, 장거리자동전화) 시스템이 도입되었다. 공중전화로도 전국 어디로든 통화를 할 수 있는 세상이 됨으로써, 우체국의 전화교환원이라는 직업이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이다. 서울 등 대도시의 경우, 공중전화를 관리하는 사람들만큼,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 욕을 많이 얻어먹는 사람들도 드물었을 것이다. 공중전화는 걸핏하면 고장이 났다. 동전만 홀랑 삼켜버리고 통화가 한 되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런 경우 송수화기걸이를 몇 번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 공중전화가 꾸준히 증설되어서 시민들의 통신에 어느 정도 숨통이 트여가고 있었는데, 문제는 그런 혜택을 기대할 수 없는 시골이었다.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벽지 촌락의 경우, 동네에 전화 가입자가 단 한 집도 없는 마을이 수두룩했던 것이다.그래서 추진한 것이 ‘이동(里洞)단위전신전화취급소’ 제도였다. 다섯 가구 이상이 모여 사는 마을이면 어느 곳에나 전화 취급소를 설치한다는 방침이었다. 마을 이장이나 혹은 유력한 유지의 집에다 정부에서 전화 한 대를 가설해 주고, 마을 사람들 누구나 그 전화기로 걸기도 하고 받기도 하도록 하는 제도였다. 물론 주민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니까 넓은 의미의 공중전화로 분류할 수가 있었지만, 걸려오는 전화도 받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도시의 그
1966년, 동대문 전화국 직원이었던 김기태씨는 그 시기에 이미 가정을 이룬 데다 만학(晩學)을 하는 처지였으므로, 생활이 매우 곤궁하였다. 어느 날 과장이 그를 불렀다.“부인이 임신했단 얘기를 들었는데… 뒤늦게 공부하랴, 가장 노릇하랴, 힘들지?”“아닙니다. 할 만합니다, 과장님.”“내가 기태씨한테 특별히 선물을 하나를 하려고 하는데 말이야….”“저한테 무슨 선물을…”“김기태씨 명의로 공중전화 한 대를 인가해줄 테니까, 부인한테 관리하라고 해서, 대학 등록금이라도 벌도록 해봐요.”“예? 감사합니다, 과장님. 정말 감사합니다!”체신부 5급(지금의 9급) 공무원이었던 김기태씨는 뒤늦게 야간대학에 진학해서 만학을 하고 있었는데, 그의 어려운 처지를 보다
우리는 흔히 길거리의 무인 공중전화만을 공중전화로 인식하고 있으나, 우체국에 찾아가서 걸었던 시외통화가 바로 그 이전 단계의 공중전화였다.1960년대 초, 충청남도 홍성 우체국에 한 노인이 들어선다.“할아버지 무슨 일로 오셨어요?”“대전에 있는 큰아들한테 전화 걸라고 왔는디…”“아드님 전화번호가 몇 번이지요?”노인이 주머니에서 ‘대전 1328번’이라 적힌 종이쪽지를 꺼내 보인다.“연결되면 말씀 드릴 테니 저 쪽에 앉아서 기다리세요.”그 사이에 대기석에 앉아있던 중년 남자가 일어나서는 직원에게 따진다.“어이, 아가씨, 서울 전화 신청한 지가 두 시간이 다 돼가는 성부른디, 어치케 된 겨?”“아직 연결 안 됐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