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끝자락, 김호면은 신설동 무허가 이발관에서의 1년 동안의 ‘기술자 생활’을 마감하고 다시 광주로 내려갔다. 해마다 3월이면 이용사 면허시험이 치러졌는데, 이발소 근무 경력이 3년 이상 된 사람에 한해서 응시자격을 부여했다. 따라서 경력증명서를 발급받기 위해서는 그가 꼬마시절을 보냈던 광주의 그 이발소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면허시험을 하루 앞둔 이듬해 3월 어느 날, 주인이 일찌감치 영업을 끝내고는 이발소 식구들을 불러 모아놓고 목청을 다듬었다.-내일은 우리 일선이발소에 큰 행사가 있는 날인데, 다들 알고 있
광주의 이발소에서 3년 동안 그럭저럭 기술을 익힌 김호면은, 열여덟 살 되던 해에 서울행 완행열차에 몸을 실었다. ‘꼬마’ 생활을 면한 뒤에 어느 정도 이발 기능에 자신이 붙으면, 업소를 옮겨야 기술자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친구의 소개로 그가 찾아간 곳은 무허가 이발관이 밀집된, 신설동 하천변의 판자촌이었다. 청계천이 복개되지 않았던 시절, 동대문에서 노벨극장에 이르는 개천가에는 무허가 이발소가 30군데도 넘게 늘어서 있었다.“간판도 뭣도 없이 판잣집 안에 이발 기구를 대충 갖춰놓고서 청계천변의 염색공장 노동자들, 막일하는 사람들
옛 시절, 도제식으로 무슨 기능을 익히겠다고 들어간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느꼈던 답답함이 있었다. 도대체 진도가 안 나간다는 점이었다. 1960년대에 광주의 변두리 이발관에 ‘꼬마’로 들어가 고생했던 김호면 씨의 경험담이다.“연탄불에 고데기를 달군 다음 물에 알맞게 식혀서 이발사에게 건네준다…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아요. 온도조절을 못 해서 몇 번이나 손님 머리를 태워먹을 뻔했는데, 그럴 때마다 불같이 화를 내기만 했지, 어떻게 하라고 차근차근 가르쳐주질 않아요. 왠지 아세요? 오래 붙잡아두고 꼬마로 부려먹겠다는 심보였지요.”따라서 ‘
1961년 겨울, 열다섯 살짜리 소년 김호면이 이발소에 취직을 했다. 광주시 학동에 자리한 ‘일선이발관’이다. 하지만 말이 취직이지 그의 신분은 좀 애매하다. 연습생도 아니고, 견습공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슨 머슴도 아니다. 그 이발소 주인이 그를 무어라 부르는지 들어보니,-야, 꼬마야, 빗자루 가져와서 바닥 머리카락 좀 쓸어라!이런 식이다. 아하, 그는 ‘꼬마’다. 이제부터 ‘꼬마’는 그의 이름이고, 직함이며, 역할이다.당시 변두리 소규모 이발소의 인적 구성을 보면 이발소 주인을 정점으로 바로 밑에 ‘기술자’라고 불리는 사람이 있
1961년 봄,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봉갑리에 태를 묻은 15살 소년 김호면이 집을 나왔다. 광주행 버스를 탔다. 그의 부모님은, 이제 국민학교 졸업해서 한글도 깨쳤으니 함께 농사지으면서, 정 공부를 하고 싶으면 이웃마을에 있는 서당에라도 다니라고 붙잡았으나 그는 듣지 않았다.“내가 8남매 집안의 막내아들이었어요. 형과 누나들은 타관으로 떠났지요. 장차 뭘 해먹고 살까 생각하니까 앞이 캄캄합디다. 우리 동네는 20호밖에 안 사는 쬐끄만 마을인데다 전기도 안 들어왔거든요. 농사라 해봐야 논은 없고 밭만 열 마지긴데 거기다 ‘청춘’을
인천광역시 계양구의 한 주택가 골목.청‧백‧홍의 이발관 표시등을 따라 들어가 허름한 밀창을 열면, 일곱 평가량의 공간에 이발의자 세 개가 조촐하게 놓인, 전형적인 동네 이발관 내부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곳이 이발 경력 40년(2000년 12월 당시)의 김호면 이발사가 꾸려가는 ‘인정이발관’이다.김씨는 내게 간이 의자를 내어주고는, 동년배 손님의 머리에 가위질을 하면서 푸념부터 늘어놓았다.“내가 처음 이발을 배울 때만 해도 업소간 거리 제한이 있어서 사방 2킬로미터 이내에는 영업허가를 안 내줬어요. 뿐만 아니라 아무리 어린 남자애라도
내가 어렸을 적만 해도 이발사는 ‘하이칼라 머리’를 창조하는 예술가였다. 자기 스스로가 하이칼라 머리를 하고 말쑥한 양복 차림에 나비넥타이를 맨 멋쟁이 이발사는, 자동차 운전사와 더불어 아주 부러운 직업이었다는 인상이 깊게 남는다. 이발사의 ‘사’ 자를 스승 사(師)로 쓰게 했던 것으로 미루어 이발사가 철부지 어린이들의 눈에만 우러러 뵌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철학자 김태길의 수필 ‘이발소’의 한 대목이다. 김태길은 1920년생이니 그의 ‘어렸을 적’이 언제쯤인지를 어림하는 건 어렵지 않다.실제로 1920년을 전후하여 많은 유학생들이
걸립(乞粒)이라는 말이 있다. 한자의 뜻을 풀면 ‘곡식을 구걸한다’는 의미다. 어떤 집단에서 특별히 경비를 쓸 일이 있을 때, 집집마다 다니면서 굿을 해주고 돈이나 곡식을 얻는 행위를 일컫는다. 마을에서 서당을 짓거나 다리를 놓거나 혹은 나룻배를 건조할 때, 그 경비 마련을 위해서 가가호호를 돌며 ‘걸립굿’을 했다.걸립굿은 대문을 들어서면서 하는 문굿, 마당에 들어가서 하는 마당굿, 대청마루에서 하는 성주굿, 부엌에서 하는 정지굿 등의 순서로 짜인다. 육칠십 년대에 촌락에 살았던 사람이라면 자주 구경할 수 있는 풍경이었다.남사당도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습네다!’해방직후에 이승만이 특유의 억양으로 즐겨 구사했던 이 말은, 본래는 중국의 사상가 장자가 말한 ‘단생산사(團生散死)’를 인용한 것이다.그러나 6.25 전쟁이 터지자 남사당패의 꼭두쇠 남형우는 단원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다.-이 많은 단원들이 뭉쳐서 몰려다니면 굶어 죽습니다. 각자 흩어져서 살길을 찾읍시다.그래서 50여 명의 단원들은 뒷날을 기약하고서 둘씩 셋씩 패를 나누어 뿔뿔이 흩어졌다.열아홉 나이에 ‘그저 굿판이 좋아서’ 고향인 충북 제천을 떠나 남사당패에 들어가, 빨래 등 허드레 일을 봐주다
하룻밤 신세를 졌으면 마을을 떠나야 한다. 쉰 명에 이르는 남사당패를 먹여주고 재워주고 양식까지 챙겨주니, 동네 사람들이 아니 고마울 수가 없다. 곡식자루 등속을 동네 어귀에 내어놓고 공동우물로 몰려가서 지신밟기를 해준다. 보은의 굿판이다. 지신(地神)을 달래고 잡신과 악귀를 물리쳐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비는 지신밟기는, 대개는 정초에 하는 행사다.우물가에서 어떻게 굿판을 벌이느냐고 묻자, 왕년에 남사당 풍물패의 상쇠였던 윤덕현 씨가 사설을 곁들여 꽹과리를 쳐보인다. ‘샘굿’ 할 때 읊조리는 사설의 내용이 흥미롭다.“…천지 우주는
남사당놀이 중에서 남녀노소가 모두 좋아하는 구경거리 중 하나가 ‘무동놀이’다. 어린 남자 아이가 어른의 어깨위에 올라선 채로 춤을 추면서 마당을 도는 놀이다.‘무동(舞童)’은 놀이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어른의 어깨 위에 올라서서 춤을 추는 그 아이를 일컫는 호칭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성으로서 꼭두쇠 남편을 따라 오랫동안 남사당 활동을 했던 박계순 씨에 따르면, 단원들 사이에서는 무동춤을 추는 그 아이들을 미동(美童)이라 불렀다고 한다. 생김이 곱상한 아이들을 무동으로 뽑았다는 의미가 아닐까.하나의 남사당패 안에는 예닐곱 명 가량의
추수를 마친 가을 저녁, 시골 전통마을의 널찍한 부잣집 마당에 불빛이 환하다. 한가운데에 모닥불이 지펴지고, 마당의 좌우 양쪽으로는 솜방망이에 붙은 기름불이 활활 타오른다. 저녁밥을 먹자마자 삼삼오오 몰려나온 동네 사람들이 담장 안쪽으로 겹겹이 둘러앉거나 서서, 안마당에 또 하나의 도톰한 담장을 만들었다.이윽고 공연복으로 갈아입은 남사당 단원들이 등장한다.-자, 저녁밥을 배불리 얻어먹었으니 한바탕 신나게 놀아보세!풍물패의 상쇠가 꽹과리 소리로 신호를 하자, 이어서 북장구 소리가 어우러져 한바탕 굿판이 벌어진다. 구경꾼들도 덩달아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