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부산의 대청동 언덕바지에 자리한 KBS의 부산 지방 청사.갓 스무 살의 풋내 나는 젊은이가 스튜디오에 들어서더니 이윽고 마이크 앞에 앉는다. 심호흡 한 번으로 숨을 고르고 나서, 드디어 방송을 시작한다.여기는 대한민국 중앙방송국입니다, KBS!이른바 ‘콜 사인’이라고 부르는 단 5초짜리 이 방송이 아나운서 임택근의 데뷔작품이었다. 그런데 부산의 ‘지방’ 방송 청사에서 왜 ‘중앙’ 방송국이라 했을까?전쟁이 한창이었기 때문에 서울에서 내려간 방송 팀이 피란지인 부산에다 얼기설기 중앙방송을 꾸린 것이다. 당시 연희전문(연세대)
온 나라를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2002 한국-일본 월드컵 대회’.사상 최초의 16강 진출을 목표로 삼았던 한국 대표팀이 4강 진출이라는 기적을 연출해 내자, 전국 방방곡곡에 ‘대-한-민-국!’을 연호하는 국민의 함성이 메아리쳤는데….그 감격적인 경기 상황을 텔레비전 중계화면으로만 감상했던 사람들은(특히 1950~60년대를 살았던 나이든 축이라면 더욱), 매우 소중한 추억거리 하나를 놓치고 말았다.요즘이야 모든 경기 중계를 TV로만 하지만, 2002 월드컵 당시엔 한국이 출전한 경기를 라디오로도 중계했다.한국과 폴란드의 대결
교사가 칠판의 분필가루받이에 커다란 주판을 올려놓고 학생들을 가르친다. 그 교육용 주판을 ‘대주판’이라 했다. 주판알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뀀대가 솔 모양으로 만들어졌으나, 이 교실 저 교실로 옮겨 다니면서 몇 년을 사용하다보면 헐거워져서, 올려놓은 주판알이 제 풀에 미끄러지기도 했고, 그 바람에 교사가 계산해 놓은 답이 틀려서 학생들의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주산에서 가장 흥미로운 과목은 암산이다. 암산에는 인쇄된 숫자를 보고 주판 없이 셈을 하는 독산암산과 불러주는 수를 듣고 머릿속에서 계산을 하는 호산암산이 있다. 초등학교 때
1955년, 중학 졸업을 앞둔 홍진기는 당시 초등학교 교장이던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서울로 올라가서 덕수상고에 진학하게 되는데, 당시만 해도 신입생의 90%는 같은 울타리 안에 있던 덕수 중학교 졸업생들이었다. 지방 출신 학생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드디어 첫 주산 수업시간이 돌아왔다.“나는 너희들의 주산을 담당할 선생님이다. 상업고등학교에서 주산이 얼마나 중요한 과목인가 하는 것은 이미 들어서 알고 있을 것이다. 주판 안 가져온 사람 앞으로 나와!”꽤 여러 명의 아이들이 앞으로 나갔다.“상업학교 학생이 주판을 안 갖고 학교에 오는
서기 2001년, 우리나라 주산교육의 변천과정을 증언해 줄 사람을 추천받기 위해서, 서울 지역의 대표적인 상업고등학교 몇 군데에 전화를 걸었다가 우선 달라진 학교 이름 때문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업고등학교 대부분이 어느 사이에 정보고등학교, 혹은 무슨 정보산업고등학교 등으로 간판을 바꿔 단 것이다.학교 이름에서 ‘상업’이 빠지고 그 자리를 ‘정보’가 차지한 것은 단순한 교명 변경이 아니라 주산·부기·타자로 상징되던 예전의 상업학교 교육이, 컴퓨터 중심의 정보화교육으로 탈바꿈했다는 얘기가 된다.그러나 2001년만 해도 벌써
“할아버지, 우리 곡식 값 모두 얼마지요? 보리쌀 두 되하고 찹쌀 한 되, 그리고 메주콩 닷 되….”“잠깐만, 수판을 가져다 계산을 해봐야지. 보리쌀 한 됫박이 65원이니까 65를 두 번 놓고, 거기다가 찹쌀 값이 280원이라…에, 또 메주콩 닷 되 값을 더하면…다섯 개짜리 알맹이 하나를 내렸으니까 아래 쪽 알맹이 두 개를 떨고…그럼 이게 얼만가? 단, 십, 백, 천….”육칠십 년대, 흔히 구경할 수 있던 동네 쌀집 풍경이다. 콧잔등에 돋보기를 무겁게 걸친 주인 할아버지가 큼지막한 주판알을 올렸다 내렸다 하며 쌀값 계산을 하는데 더
요즘이야 소설작품이나 텔레비전 연속극에서 주인공들이 걸리는 병명이 매우 다양하고 또 구체적이지만, 1970년대까지만 해도 문학작품이나 영화에서 요절하는 ‘비련의 주인공들’ 대부분은 결핵으로 죽는 것으로 설정이 됐다. 예술작품이 시대상을 담는 그릇이라 할 때, 그만큼 결핵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많았다는 반증일 것이다.그것은 외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독일 출신의 노벨상 수상작가 토마스 만은, 결핵에 걸린 부인을 돌보기 위해 스위스의 요양소에 들어갔다가, 그 요양소에서의 체험을 ‘마의 산’이라는 걸작으로 빚어내어 세상에 남겼다.결
의사 송선대 씨가 보건사회부 소속의 공무원 신분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현지의 보건대학원에서 국가관리 질환, 그 중에서도 결핵분야를 연구하고 돌아온 때가 1982년이었다.귀국 후 그는 의 초대 원장으로 발령을 받았다는데, 당시 그 병원은 노르웨이에서 파견된 사람이 의료 원조 차원에서 한국의 아동 결핵환자들을 수용해서 치료하던 시설이었다. 그러니까 노르웨이 측에서 그 의료기관을 한국정부에 넘겨주면서 ‘국립목포결핵병원’이라는 간판을 새로 달았고, 송선대 씨가 초대 원장으로 부임하게 된 것이다.“송 선생 같이 젊고 유능한
시골의 5일장 날은 장사꾼들에게 뿐만 아니라, 보건소 의료진에게도 대목 날이었다. 1960년대 당시엔 교통이 지극히 불편했기 때문에, 오지 마을에 사는 환자가 읍내에 있는 보건소까지 찾아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보건소장이 간호사를 대동하고 면소재지에서 열리는 5일장을 찾아 순회 진료를 나갔던 것이다. 당시만 해도 자동차가 대단히 귀한 시절이었지만, 외국의 원조기관에서 지프 한 대씩을 보건소에 기증했기 때문에, 그나마 기동성 있게 움직일 수가 있었다.“선생님, 오늘은 어디다 점방을 차리지요?”“으음, 일단 면사무소로 가자.
2001년 가을,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화전동에 갔다.‘도리원’이라고도 불리는 이 전형적인 농촌 마을의 들머리에 들어서자 이라는 작은 규모의 의원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내가 찾아갔을 때, 그 병원은 수리가 한창이었는데, 농촌 노인들의 질환을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진료기관으로 재개원하기 위해서 보수공사를 하는 중이라고 했다. 그 병원의 원장을 새로 맡게 된 송선대 씨는 1960년대 중반에 의사가 된 이후 국립마산결핵병원에서 공무원으로서의 정년을 채우고 물러났다. 평생을 결핵환자와 더불어 살아온, 우리나라 결핵 진료 분야
형은 꽃가지를 쥔 채 연거푸 기침을 하였다. 나는 형의 손에서 꽃가지를 빼앗아 방 한 구석으로 던졌다. 양 손으로 입을 막았지만 기침은 멎질 않았다. 처음에 나는 형의 손에, 떨어진 화판이 묻어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다. 형의 입에서는 기침할 때마다 화판 같은 피가 흘러나왔다. 어머니가 방안에 들어섰을 땐 지쳐 쓰러져 누워 있었다. 어머니는 아무런 말씀도 않고 피투성이가 된 형의 얼굴과 손을 닦아주고 주변을 훔쳐내었다. 형은 숨 쉬는 것마저 괴로운 모양이었다.정한숙의 중편소설 ‘어느 소년의 추억’에 나오는 한 장면이
1958년 12월 24일, 야당인 민주당 의원들은 자유당의 국가보안법 개정안 강행처리를 저지하기 위해 본회의장에서 철야농성을 벌이고 있었다.그런데 갑자기 회의장의 문이 열리고 제복을 입은 300명의 경위들이 들이닥쳤다. 사실 그들은 경찰 소속의 무술경관들이었는데 국회경위의 복장으로 위장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야당 의원들 전부 끌어내!”국회 사무총장의 지시가 떨어지자, 여기저기 고함과 비명 소리가 난무하고…본회의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야당의원 한 사람당 경관 네 명이 달려들어서는 사지를 나눠 잡고 ‘운반하여’ 지하실로 통
국회 속기록을 열람하다 보면 군데군데에 괄호를 치고 ‘장내 소란’이라 적어놓은 대목이 눈에 띈다. 정식으로 발언권을 얻어서 하는 의원의 발언이야 물론 속기록에 그 내용이 모두 담긴다. 그런데 의원들이 발언을 하거나 국무위원이 답변을 할 때, 회의장 여기저기서 마구 터져 나오는 소리들이 있다.“누가 무슨 말을 하는지 분간할 수 없이 와글와글하면 속기록에 그냥 ‘장내 소란’이라고 쓰지요. 누군가 의석에서 하는 말을 분명히 알아들었을 때에는 가령 ‘발언 취소해, 라고 외치는 의원 있음’ 이렇게 적어요.”왕년의 국회 속기사 김진기 씨의 증
제헌국회 시절에는 우리나라에 워낙 속기사의 수가 적었기 때문에, 국회 소속이면서도 행정부에 불려가서 속기 업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당시 국회 속기사였던 김진기 씨 역시, 공보처에 파견 나가는 일이 잦았다. 이승만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할 때마다 그 내용을 속기로 받아서 기록하는 역할을 맡았던 것이다.1949년의 어느 일요일 새벽, 전화벨 소리가 김진기를 깨웠다. 송수화기 너머의 인물은 공보처장이었다.“당장 진해에 내려가야 하니까 빨리 복장 갖추고 공보처로, 아니 비행장으로 나와요!”경남 진해에서 이승만 대통령과 장개석 자유중국 총통이
운동 경기 중에서 농구경기를 중계하는 아나운서의 말이 가장 빠르다고 한다. 그런데 국회 속기사들은 3, 4, 5대 의원을 지냈던 김선태 의원의 발언 속도가 그보다 훨씬 더 빨랐다고 증언하였다.당시 여당(자유당) 의원들은 흥분할 일이 적어서 발언이 차분했던 데 반해서, 그는 자유당의 독재와 부패를 질타하는 데 선봉으로 활약했던 야당의원이었으므로, 속기사들이 말을 받아 적기에 더욱 애로가 컸다는 얘기다.1961년 4월 21일 국회 본회의장, 왕년의 판사 출신 김선태 의원이 속사포를 쏘아댄다.“만일 정당에서 공안위원회 구성을 다 해버린다
“기본문자라고 해서 가나다라마바…를 표시하는 속기 부호가 따로따로 있지요. 하지만 일일이 그렇게 낱낱의 부호로 적으면 속도를 낼 수 없어요. 가령 ‘합니다’는 이렇게 빗금 하나를 쭉 그으면 되고, 그 위에 점을 하나 찍으면 ‘합니까’가 되고….”왕년의 국회 속기사 김진기 씨가 속기의 기본 원리를 설명한다. 그러니까 자주 쓰는 말들은 일일이 음절단위로 적는 게 아니라, 한 덩어리의 어휘를 간단한 부호 하나로 나타낸다는 얘기다. 따라서 능숙한 속기사들의 경우, 국회의원이 발언을 마침과 동시에 그것을 받아 적는 동작도 끝마칠 수가 있다.
“아, 아, 여러분, 모두 착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랫동안 기다리게 해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지금부터 의장 선출을 위한 절차에 들어가겠습니다. 우선 오늘 임시로 사회를 보실 분을 뽑겠습니다.”“연령으로 보나 학식으로 보나 우리 민족이 가장 존경하는 김규식 박사를 임시 사회자로 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찬성이오!” “옳소!”(의석에서 박수 소리)단기 4279년, 서기로는 1946년 12월 11일 오전 10시에 막을 올린 남조선 과도입법의원(南朝鮮過渡立法議院) 제1차 회의 장면이다.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이 과
“야, 박봉자! 너 낼 막차 탄다고 했지? 이 언니가 좋은 걸 가르쳐 줄게. 자, 종이에다 표시를 하자면, 여기가 증평 종점이고, 이렇게 청주 쪽으로 죽 오다 보면 말이야…여기쯤에 저수지가 있고, 이쪽에 고갯길이 있잖아?”“아, 초평 저수지 보이는 그 고갯길 말이지? 그런데 뭐가 어떻다고?”“몇 년 전에 우리 회사 차장이 밤중에 막차 타고 거기를 지나오는데…분명히 차안에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거든. 그래서 자리에 앉아 동전을 꺼내놓고 세고 있는데…어떤 여자가 등 뒤에서 ‘거스름 돈 내놔!’ 그러더래. 딱 돌아보니까 소복 입은 처녀가
“어이, 차장 아가씨, 이 소쿠리 좀 받아 올려 줘.” “아이고 아줌마, 이건 화물차가 아니고 버스예요, 버스.” “아, 오늘이 증평 장날 아녀. 콩도 팔고 찹쌀도 내다 팔고, 씨암탉 한 마리도 팔아야 추석을 쇨 것 아닌감.” “그런데 아저씨, 그 염소를 버스에 태울라고요?” “미안해요 차장 아가씨. 여그서 장터까장 끌고 갈 수도 없고, 염소 한 마리 싣자고 화물트럭을 빌릴 수도 없는 노릇 아녀.” “안 되는데…버스 바닥에다 똥 싼단 말이에요.” “똥 싸면 내가 책임질게.”1970년대 중반, 충청도 청주에 적을 둔 시내버스의 어느
“운행을 마치고 기숙사에서 모두 잠에 떨어져 있었는데, 사감이 들이닥쳐서는 차장들을 모두 깨우더니, 옷을 전부 벗으라는 거예요. 브래지어까지 모두 다요. 언니들이 항의를 했지만 통하지 않았어요. 난 무서워서 덜덜 떨고만 있었지요. 그런데, 소지품 검사 결과 한 언니한테서 감춰뒀던 2만원이 나왔어요. 몸수색을 항의했던 다른 차장들이 할 말이 없어져버린 것이죠. 며칠 전부터 아버지 수술비 때문에 걱정을 달고 지내던 언니였는데…결국 쫓겨났지요.”1970년대 말에 지방도시인 청주에서 버스차장으로 일했던 박봉자 씨의 얘기다.버스회사 측의 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