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캬, 술맛 억수로 좋다. 월남에 있을 때 말야, 그러이깨네 다낭 밑에 호이안이라는 데가 있는데, 거기서 베트콩하고 전투가 벌어졌거든. 그런데 그 전날 밤에 시내 나갔다가 콩까이들하고 어울려서 술을 억수로 퍼마신기라.-쯧쯧쯧, 백마부대 군기가 그렇게 형편 없었등가? 중요한 전투를 앞두고 술을 떡이 되게 마시게?-더 들어 보그라. 다음 날 밀림 속으로 들어가서 따다다다…쏘고 볶고 한참 전투를 하다가 발밑을 보이께네, 팔뚝만한 구렁이 한 마리가 쓰윽 지나가기라. 가만 둘러보이, 고놈이 둥지에다가 알을 가득 낳아놨더라고. 옳다구나 하고
시민아파트 입주민들에게 아파트가 생겼다는 것은, 먹고 사는 여러 문제들 중에서 ‘몸 둘 곳’이 해결됐다는 의미일 뿐이었다. 시에서 일자리까지 주선해주지는 않았기 때문에, 생계를 위해서는 제가끔 밥벌이 전선으로 나가야만 했다. 그 벌이 수단이라는 것이 이전에 판자촌에 거주할 때와 달라진 게 없었다.남자들은 대체로 건축현장 등에 나가 품을 팔았고, 여인들은 주로 보따리 장사를 했다. 혹은 부부가 함께 행상에 나서기도 했다. 건어물 행상도 하고, 옥수수도 쪄서 내다 팔고, 달고나 장사도 하고, 인근 동대문시장에서 양말 등속을 떼다가 주택
“아파트가 뭔지도 모르다가 시민아파트에 딱 입주를 하니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방이 두 갠데 방마다 각각 다락이 하나씩 있었어요. 그땐 가난한 집일수록 애들이 주렁주렁 많았잖아요. 그래서 아마 일부러 다락을 둘씩이나 만들어준 것 같아요. 물론 연탄 때는 부엌도 따로 있고 창문 열면 베란다도 있었고요. 시에서는 공식적으로 ‘11평 아파트’라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한양공대 건축과 학생들이 실습 차 나와서 내부 면적을 자세히 측량을 해보더니, 실 평수가 9.1평이래요. 세상에, 지금 생각하면 좁아터진 공간인데, 그땐 거기서
-잘 들으세요! 이 포대 속에 동글동글한 구슬이 여러 개 들어있는데, 그 구슬에는 여러분이 입주해서 살 아파트 호수들이 적혀 있어요. 한 사람씩 차례차례 나와서 제비를 뽑으세요!1969년 12월, 창신동의 낙산시민아파트 28개 동이 완공되었다. 낙산아파트의 경우, 아파트 건축 부지에 살던 사람들을 멀찌감치 경기도 광주군으로 이주시키고 나서 공사를 진행했기 때문에, 입주자들이 삼일아파트처럼 뚝섬 등의 임시거처로 나가서 지낼 필요가 없었다. 사람들이 호기심 어린 손길로 제가끔 구슬 하나씩을 집어 들었다.-송칠복 씨는 15동 307호!-
1969년, 청계천의 무허가 판잣집들을 철거한 자리에 7층짜리 아파트 24개동이 들어섰다. 삼일고가도로가 그 해 3월에 완공되었고, 그 고가도로 옆으로 조성되었기 때문에 이름도 ‘삼일시민아파트’가 되었다.철거민들을 수용하기 위해서 서울시에서 지은 아파트라고는 하지만, 시민 부담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파트를 지을 부지를 빌려주고, 그 곳에다 건물의 외형을 만들어 주는 것까지가 서울시의 몫이었고, 내부에 칸막이를 하고 문짝을 달고 하는 데에 드는 경비는 입주자가 부담했다. 그 부담액이 40만원이었다는데 매월 2,000원씩, 2
서울의 창신동 언덕바지를 타고 오르면 낙산(駱山)이라는 바위산이 우뚝 솟아 있었다. 1960년대에는 그 일대가 또 유명한 ‘하꼬방촌’이었다. 나는 수소문 끝에, 그곳의 무허가 판자동네에 살다가 초기에 낙산시민아파트를 분양받아서, 20년 뒤 철거될 때까지 거주했던 한 노인을 만날 수 있었다. 1934년생 유재근 할아버지다.“군(軍)을 제대했지만 시골에서 뭐 해먹을 게 있어야지요. 그래서 지게품팔이라도 하자, 하고 상경한 때가 1950년대 말이었어요. 그땐 봉천동이니 어디니 하는 데는 가봤자 이미 사람들이 다 터를 잡고 있어서 판잣집마
“청계천에서 하꼬방 짓고 살던 시절 얘기? 아이고, 생각하기도 싫어. 지방에서 올라온 갈 데 없는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판잣집들 짓고 살았지. 뭘 해먹고 살았냐고? 그렇게 물어보면 곤란하지. 그냥… 빌어먹고 살았지 뭐. 남편이 중부시장에 가서 지게질도 하고 품팔이도 하고 그랬지만 공치는 날이 태반이고, 몇 푼 벌어봤자 애들이 한두 명이어야지. 그땐 워낙 굶는 사람이 많으니까, 저기 왕십리교회하고 성동공고 교문 앞에 가면 강냉이 죽을 끓여서 날마다 배급을 줬어. 우리 집 새끼들이 양재기 들고 거기 가서 배급이라고 타오면 식구대로 그거
2001년 가을.서울 시내 중심부의 광교 쪽에서 3.1고가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한참을 달리다 보면, 옛 청계천변 오른편에 평화시장이 나타난다. 평화시장을 지나 청계천 8가쯤에 이르면, 고가도로 아래쪽의 도로변을 따라, 언제 지었는지 그 연륜을 가늠하기조차 어려운 퇴락한 잿빛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다. 3.1고가도로를 달리던 자동차 속에서 두 남자가 주고받는다.-저게 뭐 하는 건물인지, 맨날 지나다녀도 도통 모르겠어. 아마 20년도 넘게 저 자리에 서 있는 것 같은데?-20년이 뭐야? 내가 고등학교 때부터 봤으니까 못해도 30년은 됐
1965년 봄, 광주시 학동의 일선이발관.난생 처음 정장을 차려입은 스무 살 청년 김호면이 이발소의 대형 거울 앞에 섰다. 이발소 주인이 김호면의 넥타이며 옷매무새를 손봐주며 뿌듯해 한다.- 야, 그렇게 차려 입으니까 3년 전에 세상 떠난 명카수 남인수가 살아 돌아온 것 같다야. 멋지다, 김호면 이발사! 자, 차 시간 늦기 전에 얼른 출발해야지. 부모님 좋아하시겠다.김호면처럼 이발관의 꼬마로 들어가서 기술을 익힌 끝에 면허시험에 합격한 경우, 주인이 양복 한 벌을 맞춰 입혀서 고향에 보내주는 것이 60년대 이용업계의 관행이었다. 이
1964년 끝자락, 김호면은 신설동 무허가 이발관에서의 1년 동안의 ‘기술자 생활’을 마감하고 다시 광주로 내려갔다. 해마다 3월이면 이용사 면허시험이 치러졌는데, 이발소 근무 경력이 3년 이상 된 사람에 한해서 응시자격을 부여했다. 따라서 경력증명서를 발급받기 위해서는 그가 꼬마시절을 보냈던 광주의 그 이발소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면허시험을 하루 앞둔 이듬해 3월 어느 날, 주인이 일찌감치 영업을 끝내고는 이발소 식구들을 불러 모아놓고 목청을 다듬었다.-내일은 우리 일선이발소에 큰 행사가 있는 날인데, 다들 알고 있
광주의 이발소에서 3년 동안 그럭저럭 기술을 익힌 김호면은, 열여덟 살 되던 해에 서울행 완행열차에 몸을 실었다. ‘꼬마’ 생활을 면한 뒤에 어느 정도 이발 기능에 자신이 붙으면, 업소를 옮겨야 기술자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친구의 소개로 그가 찾아간 곳은 무허가 이발관이 밀집된, 신설동 하천변의 판자촌이었다. 청계천이 복개되지 않았던 시절, 동대문에서 노벨극장에 이르는 개천가에는 무허가 이발소가 30군데도 넘게 늘어서 있었다.“간판도 뭣도 없이 판잣집 안에 이발 기구를 대충 갖춰놓고서 청계천변의 염색공장 노동자들, 막일하는 사람들
옛 시절, 도제식으로 무슨 기능을 익히겠다고 들어간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느꼈던 답답함이 있었다. 도대체 진도가 안 나간다는 점이었다. 1960년대에 광주의 변두리 이발관에 ‘꼬마’로 들어가 고생했던 김호면 씨의 경험담이다.“연탄불에 고데기를 달군 다음 물에 알맞게 식혀서 이발사에게 건네준다…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아요. 온도조절을 못 해서 몇 번이나 손님 머리를 태워먹을 뻔했는데, 그럴 때마다 불같이 화를 내기만 했지, 어떻게 하라고 차근차근 가르쳐주질 않아요. 왠지 아세요? 오래 붙잡아두고 꼬마로 부려먹겠다는 심보였지요.”따라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