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제8대 임금인 예종 재위 원년(1469년) 정월 보름날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술돼 있다.관상감(觀象監)에서 임금에게 미리 고하기를 이 달 14일 축시(丑時)에 월식(月蝕)이 있을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 때에 이르러 월식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자 다음 날 도승지 권감(權瑊)이 아뢰었다. “주상전하, 예부터 관상감에서 점을 쳐서 아뢸 때 ‘앞선 사람도 죽이고 용서하지 않으며, 때에 미치지 못한 자도 죽이고 용서하지 않는다(先時者殺無赦, 不及時者殺無赦)’라고 하였사옵니다. 지금 관상감의 관리(官吏)가
매일이다시피 뒷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해 와야 하는 일은, 여남은 살 고아원 원생들에겐 매우 힘든 노역이었다. 그럼에도 원생들은 땔나무 하러 가는 그 행차를 한편으론 기꺼워하기도 했다. 개구리를 잡아 구워먹을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었다.당연히 고아원의 관리자들도 원생들이 ‘개구리 구이’로 영양보충을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을 터, 그들의 신통한(?) ‘보급투쟁’을 지켜보고만 있지 않았다. 오후일과를 시작하기 전, 총무 선생이 남자 원생들에게 미군부대 마크가 새겨진 분유통 하나씩을 나눠 주며 말한다.-산에서 잡든 개천에서 잡든, 그 깡통을
봄이 왔다. 궁핍의 시대를 살아내야 했던 대부분의 서민들에게도 그러했듯이, 화성자혜원에 수용된 전쟁고아들에게, 봄은 약동하는 계절도 희망을 상징하는 그 무엇도 아니었다. 그저 힘들게 넘어 채야 하는 보릿고개였다.고아원의 살림살이가 핍진한 형편이다 보니 아침엔 꽁보리밥을 먹고, 점심은 옥수수가루 풀죽으로 대충 때우고, 저녁에는 수제비를 먹는 식으로 간당간당 끼니를 이어갔다. 그러다보니 원생들은 늘 허기에 차 있었다.하지만 그래도 봄이었다.고아원이 위치한 용주사 근방에 사도세자 부부가 묻힌 융릉(隆陵)과, 그의 아들 정조와 효의왕후를
경기도 화성의 용주사 경내에 자리한 ‘화성자혜원’에 가을이 왔다. 전쟁이 끝나고도 여러 해가 지났지만, 헤어진 가족과 연락이 닿지 않아 모름지기 고아로 남아있는 아이들이 아직도 줄잡아 수백 명이었다. 하지만 아이들 중 누구도 이내 부모를 만나고야 말 것이라는 희망을 결코 내려놓지 않았다.점심을 먹고 고아원 운동장에서 뛰어놀던 아이들의 눈이 어느 순간 반짝 빛났다.-어, 형! 저기 저 아주머니 누구지?-원장실로 들어가는 걸 보니까 혹시…누구네 엄마가 아들이나 딸 찾으러 왔나봐.아이들은 하던 놀이를 작파하고 연신 원장실 쪽으로 곁눈질을
전쟁고아 수용을 위해 용주사 경내에 세워진 ‘자혜원’의 원생 대다수는, 전쟁이 끝나고도 한 세월이 지날 때까지 여전히 부모를 만나지 못 했다. 따라서 원생들의 신원이 공중에 붕 떠 있는 상태였으므로, 고아원 측에서 ‘호적 만들어 주기’ 작업을 진행했다. 성씨를 모르는 아이들에게는 고아원 원장의 성을 부여했고, 생일을 기억하지 못 한 원아들에겐 급한 대로 3.1절이나 광복절, 혹은 개천절 등의 국경일을 생일로 삼았다. 물론 그들 모두의 호적엔 고아원이 위치해 있던 용주사의 주소가 본적지이자 현주소로 기재되었다. 하지만 기껏 서너 살
“광나루의 양로원에서 하룻밤을 잔 다음에 미군 트럭을 타고 이 사찰로 왔거든요. 도착해 보니 어디서들 그렇게 실려 왔는지 부모와 생이별을 한 고아들이 우리 말고도 아주 많았어요. 수 개념이 없는 어린애였기 때문에 그 인원수를 가늠할 수는 없었지만, 저 넓은 절 마당에 아이들이 바글바글 꽉 들어찼으니까요.”경기도 화성의 용주사는 전쟁 통에 가족을 잃고 헤매다 사방에서 실려 온 고아들로 넘쳐났다. 아이들은 어느 날 갑자기 벼락처럼 닥친 상황변화에 누구 할 것 없이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당시 세 살 아니면 네 살이었던 이상열 씨 역시
멀지 않은 곳에서 간간이 포성이 울린다. 이따금 전투기의 굉음도 들려온다. 세 살 아니면 네 살이었던 상열이, 네 살 아니면 다섯 살이었던 누나 도화의 손을 잡고 들어간 곳은 양로원이었다. 남자가 아이들에게 말했다.-자, 이 양로원에서 저녁밥을 먹고 하룻밤을 자야 하니까 다들 안으로 들어가자.남자는 아이들을 양로원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불편하시더라도 오늘은 이 애들하고 함께 지내야 합니다. 부모를 잃어버린 아이들이에요. 어이, 거기 밥 배식하는 사람! 이 난리 통에 밥그릇이 어딨어. 깡통에다 국하고 밥하고 한꺼번에 대충 부어서
50대 중반(2002년 기준)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있다. 작은 키에 다부진 외모를 가졌고, 서울 말씨를 쓴다. 만일 이 사람이 무슨 일로 경찰서에 불려가서 조사를 받는다고 치자.-이름, 생년월일, 그리고 본적을 말해보세요.-이름은 이상열이고, 1950년 8월 15일생, 본적은 경기도 화성군 태안면 송산리입니다.-틀림없지요? 거짓말 하면 안 돼요.이 사람이 경찰관에게 진술한 내용은 모두 사실이다. 하기야, 개개인의 신상기록이 행정 전산망으로 이미 빈틈없이 구축돼 있던 21세기 벽두에, 그런 기초적인 인적사항을 거짓으로 말했다가는 금
자신이 먼저 사진을 보내달라고 편지에 썼으면서도, 막상 해외 펜팔 대상자인 미국의 여학생으로부터 사진을 전해 받고나니, 바야흐로 고등학생 장수남의 고민이 깊어졌다.‘야, 이런 저택에서 하루만이라도 살아봤으면 좋겠다. 운동장만한 잔디 정원에다 수영장에다…. 그런데 우리 집 사진을 어디서 찍어야 하나….’피츠버그에 산다는 그 여학생의 저택 사진을 보고 나니, 아무래도 자신의 집을 다른 데서 찾아봐야 할 것 같았다. 지금 살고 있는 길음동의 두 칸짜리 슬레이트집을 ‘우리 집’이라고 내보일 수는 없었다. 그래서 동네 사진관에서 카메라를 빌
해외여행이 자유화 한 때가 1989년이었으니, 1960~70년대의 경우 일반 시민들에게는 외국에 나가볼 기회 자체가 주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나라 밖 이역에 대한 지식이라야 사회과부도나 흑백텔레비전이나 외국영화에서 보고 들은 것이 거의 전부였다. 그런 때에 외국 사람과 편지를 주고받는다는 것은 여간 경이로운 일이 아니었다.당시에는 서울에, 해외펜팔을 소개해 주고 수수료를 받는 회사들이 여럿 있었다. 영국이나 미국의 이성 친구를 소개받기는 상대적으로 어려웠고, 가까운 일본과 제3세계 국가들과는 비교적 연결이 쉬웠다. 초등학교 교사로
‘펜팔은 펜팔로 끝나야 펜팔답다’는 얘기가 있었다. 그러나 그야말로 미지(未知)의 처녀 총각으로 시작했다가, 평생지기 반려가 된 경우를 의외로 쉽게 찾을 수 있었다.“저희 이모는 서울 토박이고요, 이모부는 부산에 거처를 두고 원양화물선을 타던 마도로스였어요. 물론 펜팔로 소통을 하다가 결혼까지 하게 됐지요. 이모부가 세 살이나 연하인데도 워낙 오랫동안 많은 편지를 주고받아서인지, 처음 만났을 때에도 전혀 어색하지 않더라고 하시더라고요. 만난 지 두 달 만에 웨딩마치를 울렸다니까요.”2001년에 PC통신 동호회에서 만난 한 여자 회원
‘펜팔’을 얘기하면서 군대를 빼놓을 수 없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대한민국의 초·중·고등학교 학생이면 누구나 1년에 두어 번씩 위문편지를 써야만 했다. 내용이야 읽어보나마나 뻔했다.-눈보라 휘몰아치는 추운 날씨를 무릅쓰고, 전방에서 총칼을 들고 휴전선을 튼튼히 지켜주시는 국군장병 아저씨들 덕분에, 저희들은 따뜻한 후방에서 공부 열심히 하고 있으며….(식)칼을 들고(총은 빼고) 취사반에서 무 배추를 써는 일로 일과를 채우는 취사병도, 남쪽 바닷가의 해안초소에 근무하는 병사들도, 행정반에서 펜대를 굴리는 서무병도…위문편지에서만큼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