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육군 일등병 첫 휴가 때 처음으로 부산이라는 도시엘 가봤다. 막내 외삼촌이 개금동인가 하는 동네에서 유리가게를 하고 있을 때였다. 하지만 난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부산의 이모저모를 상당한 수준으로(?) 꿰고 있었다.내가 나서 자란 곳은 조선시대로 치면 전라우수영 소속의 작은 섬마을이었으므로, 경상좌수영의 본영이 있던 부산은 말만 같은 남해안이지 거리로 치면 이쪽 끝과 저쪽 끝이었다. 그럼에도 어린 시절부터 부산에 대한 이모저모를 모를 수가 없었다.내게 ‘부산’을 들려준 사람은 내 아버지를 비롯하여 노래 부르기 좋아하는 동네
윤석현 씨가 안양시에서 ‘성우사’라는 전당포를 개업한 지 반 년여가 지났을 무렵의 어느 날, 한 주부가 아이를 업고 전당포를 찾아왔다. 등에 업힌 아이의 울음소리가 유난스러웠다. 여인이 한 손으로는 포대기를 추켜 아이를 어르면서, 다른 손으로 주머니를 뒤지더니 여성용 손목시계를 꺼내 창구로 들이밀었다. 여인의 목소리가 매우 작고 희미했다.-이거 맡길 테니까 얼마가 됐든 좀 주시면….시계를 받아들었던 윤석현이 요리조리 살펴보더니 아주 잠깐 만에 판정을 내렸다.-아이고 이거, 태엽 감는 손잡이도 저절로 빠지고…너무 낡아서 잡아드릴 수
개업을 하고나서 두어 달이 지나자 ‘삼원사’ 전당포에 제법 손님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제 주인은 전당포의 운영에 관한 전권을 윤석현에게 맡기고는 며칠 만에 한 번씩만 들렀기 때문에, 그가 온전히 주인노릇을 하게 되었다.-어서 오세요. 무얼 도와드릴까요?-갑자기 친척이 상을 당했는데 돈이 한 푼도 없어서…여기 이 라디오 좀 잡힙시다.-어디, 소리는 제대로 나는지 봅시다.-소리야 항상 낭랑하게 잘 나오지. 거봐요, 틀자마자 하춘화 노래 나오는 거. ‘짝을 지어 놀던 임은 어디로 떠났기에 외로이 서서…’ 아이고, 당숙 돌아가시고 우리
어느 날 전당포에 전화가 걸려 와서 주인이 받았더니 한 취객이 혀 꼬부라진 소리로 “아저씨, 내 시계를 거기다 맡겨놨는데, 가서 보고 대답 좀 해줘요. 지금 몇 시예요?”하고 묻더라는…그런 우스개가 유행했을 정도로 60~70년대에 서민들이 전당포에 갖고 온 물품 중에는 손목시계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 시절에 전당포에서 일했던 윤석현 씨의 증언에 따르면 그러하다. 가락지(반지)가 그 다음쯤 되었다.하지만 시계나 가락지가 ‘비교적’ 많았다는 얘기고, 돈으로 바꿀 수 있는 거의 모든 물품들이 전당포 창고에 줄줄이 들어와 쌓였다.“월남전
1971년 여름, 서울 종로4가 세운상가 근방의 한 전당포.갓 군복무를 마치고 나온 청년 윤석현이 용돈이라도 벌겠다고 들어간 곳은, 먼 친척 노인이 주인으로 있던 전당포였다. 전당포 견습 직원으로 들어간 사람이면 누구나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당연히 ‘시계공부’였다.-시계를 알면 전당포 공부는 다 한 셈이지. 20년 넘게 전당포를 한 나도 잘 몰라서 가끔 실수를 한다니까. 우선 종류부터 익혀야 하는데…이 시계 상표가 뭐지?-아이고, 이건 워낙 유명한 시계니까 알지요. 롤렉스요.-자, 그럼 어디 살펴봐라. 언제 나온 제품이지?-글쎄
내가 ‘고객으로서’ 전당포를 찾은 회수는 딱 네 번이었다. 모두 혈기 방장하던 1970년대에 있었던 일인데 세 번은 싸구려 손목시계를 들고, 나머지 한 번은 역시 싸구려인 카메라를 들고였다. 세세한 사연 따윈 떠올리고 말고 할 것도 없다. 푼돈이 필요해서 갔을 터이므로.2001년 여름에 다섯 번째로 찾은 전당포는 경기도 안양에 있던 ‘성우사’라는 곳이었다. 이번엔 ‘급전을 땡기러’가 아니라 30년 경력의 그 전당포 주인한테서 옛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였다. 전당포 창구 앞에 서자 주인 윤석현 씨가 대뜸 물었다.“70년대에 전당포를 이
여자가 장롱 서랍을 여닫으며 무엇인가를 찾는다. 없다.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어째 없을까? 시집 올 때 해왔던 모본단 저고리가 하나 남아 있었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남편은 묵묵히 책만 들여다보고 있다. 현진건의 단편소설 의 도입부 풍경이 이러하다. 그 작품은 바로 이 남편의 시점에서 서술하고 있는 1인칭 소설인데, 앞부분 일부를 인용하면 이렇다.…나는 그만 묵묵하였다. 아내가 그것을 찾아 무엇을 하려는지 앎이라. 오늘 밤에 옆집 할멈을 시켜 잡히려 하는 것이다. 2년 동안에 돈 한 푼 나는 데 없고, 그대로 주리면 시장
서울의 남부지역을 관할하는 즉결 재판소는 영등포구 문래동에 있었다. 아침이 되면 각 경찰서로부터 실려 온 통금 위반자들로 재판 대기실은 금세 북새통을 이뤘다. 장발단속에 걸린 사람, 폭력을 휘두르다 잡혀온 사람, 유언비어 유포 혐의자 등 여타의 경범죄 위반자들도 함께였다.1970년대 중반의 어느 여름 날, 경상도 상주 출신 총각 윤춘일과 송준식이, 공장 일을 마치고 오랜만에 만나 소주잔을 기울인 것까지는 좋았는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마셔대다가 그만 통금 위반으로 적발되고 말았다. 어쩔 수 없이 다른 위반자들과 함께 경찰버스에 태
통행금지 관련 시리즈의 기사를 페이스북에 링크해놨더니 어떤 친구(물론 남정네다)가 이런 댓글을 달았다.-나는 그때 통행금지 덕분에 결혼했어요.통행금지 ‘때문에’ 어떤 인연을 놓쳐서 아깝게 결혼이 깨졌다면…그건 이야깃거리도 뭣도 아니다. 하지만 좌중에서 누군가가 통행금지 ‘덕분에’ 결혼에 성공했다는 말을 꺼낸다면, 그리고 당신이 바로 그 야간통금 시대에 청춘을 살아낸 세대라면, 당신은 눈빛에 야릇한 호기심을 주렁주렁 매달고서 두어 무릎을 그에게 당겨 앉으면서 이렇게 채근할 것이다.-야, 재밌겠다, 첨부터 자세히 말해봐. 어떻게 됐는지
“1960년대 중반에 내가 초임으로 근무했던 서울 신곡파출소(화곡동 소재)를 예로 들면, 경찰관은 소장을 제외하고 총 8명이었어요. 4명씩 갑부(甲部)와 을부로 나눠서 24시간 일하고 24시간 쉬는 방식으로 근무를 했지요. 방범대원의 경우 파출소 단위로 일고여덟 명쯤 배속이 됐는데 그 사람들은 저녁 6시에 나와서 다음 날 아침 8시에 퇴근을 했고요. 자정이 되어서 통금 사이렌이 울리면 그때부터는 경찰이 방법대원을 동반해서 순찰을 나가지요. 순찰 시간표와 코스가 아예 정해져 있기 때문에….”2001년 봄에 내가 통행금지 관련 취재를
조선시대에는 순작법(巡綽法)이라는 것이 있었다. 순작(巡綽)이란 야간에 군사들이 복장을 갖추고 대오(隊伍)를 이루어서 쩌렁쩌렁 호령을 하면서 거리 순찰을 하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조선 태종1년 5월 20일치 실록기사를 보면 “초경(初更) 3점(點)부터 5경(更) 3점(點) 사이에 순라(巡邏)를 범하는 자는 모두 잡아가둔다”는 내용이 올라 있다. 요즘 시각으로 치면 대개 오후 8시경부터 다음 날 오전 4시 30분 무렵까지에 해당한다.이로부터 85년 뒤인 성종16년에 간행된 에 “2경(밤 10시)부터 5경(새벽 4시) 이전
-벌써 막차가 끊어진 것 아냐?-그럴 리가 있나. 지금 몇 시지? 어이쿠, 어느새 열한 시가 훌쩍 넘어버렸네?-아이고, 그럼 우리 집 가는 버스는 이미 끊어져버렸는데…. 큰일 났네. 어, 저기 택시 온다. 택시! 택시! 정릉이요. 정릉 한 사람! 아, 수유리 간다고요? 그럼 미아리고개 너머 길음시장 입구에 잠깐 내려 주시면…. 예, 고맙습니다. 친구야, 나 먼저 간다!그래, 잘 가라. 에이, 마지막 소주 한 병, 그건 안 마시고 일어났어야 하는 건데. 어? 66번 왔다! 막차가 아직 안 끊어지고 있었어. 야호, 이거야말로 주택복권
왕년의 다방 DJ 김동욱 씨의 경험에 의하면, 다방에서 듣고 싶은 노래를 디스크자키에게 신청할 때 보면, 노래 제목과 가수 이름을 원어로 정확히 적어낸 사람은 3분의 1도 안 되었다. 어디선가 들은 기억은 있어서 입에서는 뱅뱅 도는데 그것을 글자로 바르게 적는다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가령 ‘더 복서(The Boxer)’라는 노래를 신청할 때 노래 제목은 어렵지 않게 쓰는데 가수 이름(Simon & Garfunkel)을 어떻게 쓰느냐, 하는 문제로 다탁을 사이에 두고 친구랑 혹은 연인이랑 티격태격하기 일쑤예요. 사이먼에 에이
1970년 겨울 어느 날, 강원도 원주의 버스터미널 인근에 ‘지구음악다실’이 문을 열었다. 디스크자키 김동욱이 ‘뮤직박스’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턴테이블에 레코드를 얹은 다음, 신중하게 바늘을 올려놓는다. 폴 모리아 악단의 유명한 연주곡인 ‘이사도라’가 잔잔하게 실내에 울려 퍼진다.-안녕하십니까? 저희 지구음악다실을 찾아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 지구음악다실의 뮤직페스티벌 제1부 진행을 맡은 디스코 자키 김동욱입니다. 오늘은 비틀즈 특집으로 꾸며 드리겠습니다. 첫 곡으로 ‘레이디 마돈나’를 감상하신 다음에….“개인적인 성향에 따
1970년대 중반, 서울에서 입시공부를 작파하고 음악 감상실 등을 전전하던 김동욱은 고향인 원주로 내려간다. 원주터미널 인근에 다방을 차릴 터이니 자신과 교대로 디스크자키로 일해 볼 의향이 있느냐는 친구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아들 대학 보내겠다고 품 팔고 소 팔아서 등 떠밀어 상경시켰던 부모의 처지에서 보자면…그는 말하자면 ‘돌아온 탕아’였다.“지방 소도시의 경우 음악다방이라 해봐야, 서울의 음악다방하고는 달랐지요. 그저 전축 하나 들여놓고 보통의 다방으로 문을 열었다가 젊은 층 고객들이 와서 자꾸 음악을 틀어 달라는 사람이
세월을 좀 건너뛰어서, 1970년대 중반에 지방 소도시에서 음악다방의 디스크자키를 했던 사람을 만나서 그의 디스크자키 입문담을 들어보기로 한다.1954년생인 김동욱 씨의 고향은 강원도 원주다. 그는 1974년부터 2년 동안 원주 버스터미널 근방에 있던 ‘지구 음악다실’에서 DJ로 꽤 유명세를 탔다. 그가 이른바 ‘팝송’에 눈을 뜨게 된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재수를 하러 올라가서였다.하지만 1972년에 상경하여 마포구 염리동에 있는 고향 친구의 자취방에 옷가방을 부려놓았을 때까지만 해도, 그가 입에 달고 다니던 애창곡은
대구 출신인 이창열 씨(1940년생)는 1958년도에 고향 대구에서 대학에 들어갔다가 1960년대 초에 졸업한 사람이다. 그가 대학에 다니던 시기엔 어떤 노래들이 유행했을까?“5.16 직후인 1963년도에 군 제대하고 나오니까 이미자의 ‘섬마을 선생님’이 한창 유행하고 있더라고요. 내가 입대하기 전엔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처녀 바람났네…’ 운운하는 노래하고, 왜 그 ‘파랑새 노래하는 청포도 넝쿨 아래로…’ 이런 노래들이 젊은 층에서 유행을 탔지요. 그땐 사회적으로 이젠 제발 좀 명랑한 노래를 부르자, 그런 운동이 전개됐거든요.”‘
때 : 2003년 정월곳 : 서울 도심의 한 레코드 가게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한 40대 후반, 아니면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진열장을 둘러보고 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가 한 시간째 흘러나오고 있다. 이윽고 남자가 젊은 점원에게 주춤주춤 다가가 말을 건다.남자1 : 이봐요, 저어…프라우드 메리 씨디를 사려고 하는데…점원 : 프, 프라우드 메리…요? 그게 가수 이름인지 아니면 노래 제목인지…남자2 : (건너편 진열장 쪽으로부터 반색하고 다가오며) 아, 프라우드 메리라고 하셨습니까? 나도 여기 구경나온 사람입니다만 프라우드
1962년 5월 16일,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세력이, 이른바 ‘5.16 혁명’ 1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 ‘혁명 1주년 기념우표’를 만들도록 체신당국에 지시했다. 군사정부에서 지시한 사항인 지라, 우표발행심의위원회의 심의를 거치고 어쩌고 할 계제가 아니었다.어쨌든 기념우표는 발행되었고, ‘혁명정부’를 해외에 알리기 위해서 영문판으로도 제작했으며, 수집가들을 위해서 따로 소형 기념시트(souvenir sheet)를 만들어서 공급을 했다. 그 얼마 뒤에는 한 술 더 떠서, 광화문 전화국에서 ‘국제우편전시회’라는 행사까지 개최했다
우표를 인쇄하다보면 기계에 종이가 겹쳐 들어가거나, 잉크가 번지거나, 혹은 구멍을 뚫는 점선이 엉뚱한 곳으로 비켜나는 등의 오류가 발생하여 상당히 많은 파지가 생겨났다. 하지만 인쇄가 잘 못 됐다고 해서 연애편지 쓰다 틀렸을 때처럼 그 파지를 아무렇게나 구겨서 휴지통에 내던졌다간, 공무원 밥줄 놓을 각오를 해야 했다.바로 그런 인쇄상의 오류가 발생해서 잘 못 인쇄된 진귀한 우표를 ‘버라이어티’라고 부른다 했는데, 수집상에서는 정품보다 높은 가격에 거래됐기 때문에, 그 버라이어티에 군침을 삼키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와 비례해서 한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