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모임이 있어서 한 언니를 태워서 약속장소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귀농한 지 8년 남짓 된 언니, 중년 언니들의 로망인 연금을 타는 남편과 사는데도, 어찌나 농사일을 열심히 하는지 주위 사람들이 혀를 내두를 지경입니다. 귀농하면서 택한 작목이 고사리입니다. 새싹이 눈을 틔우는 이른 봄부터 늦봄까지 고사리를 꺾는데, 고사리를 꺾는 시간보다 사이사이의 풀을 매는 시간이 더 많기도 합니다. 그렇게 첫 정을 들인 고사리 농사는 아무리 힘들어도 마냥 사랑스럽기만 하다며 애지중지 농사를 짓습니다.그렇다고 고사리 농사만 짓는 것은 아닙니
“엄마는 왜 주말에도 일해!?” 토요일에 이어 일요일까지 내처 일하려 하니 아이들의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이 입장에서는 토요일을 양보하여 일하는 엄마 옆에서 기다려 주었으니 일요일은 같이 놀아주겠지 했는데, 엄마는 간만에 비가 멈추었으니 밭 정리할 일이 시급하여 자기 마음을 몰라주니 따져 묻는 것이었다. ‘농사짓는데 주말이 어딨냐’ 타이르고 싶지만, 이렇게 엄마와 같이 놀고 싶어하는 어린 시절도 한 때 아닌가 하여 일하려던 마음을 접었다.그래도 콩대가 길어 나자빠진 물레콩과 연일 습하여 곰팡이의 밥이 되어 버린 붉은어금니동부콩
대파밭의 풀을 뽑다가 해가 지면 다음 날 시작해야 할 자리를 표시해 두고 퇴근을 한다. 시장에 들러야 하는데 어두워진 시간에는 문을 닫기 때문에 마트로 들어간다. 제육볶음용 돼지고기와 콩나물을 바구니에 담아서 계산대에 올린다.“이제 가서 언제 밥을 차릴까요?”낯익은 계산원이 동병상련의 위로 한마디를 건넨다.“그러게 말이요.”30년을 같이 산 남편한테 듣지 못하는 위로를 친분을 쌓아본 적이 없는 다른 여성한테 들으면서 한숨이 절로 나온다.결혼한 여성은 1시간 늦게 출근하고 1시간 먼저 퇴근한다(황석영, )던 그쪽
우리 마을은 매년 복날이 되면 온 마을사람들이 모여 간단한 행사를 진행하고 함께 삼계탕을 먹으며 더위도 이기고 서로의 안부도 물으며 지내왔다. 행사는 대부분 마을회관에서 진행이 되고, 함께 나눌 음식의 준비는 어느 곳이나 그렇겠지만 당연히 부녀회의 몫이다. 올해는 코로나19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모두 모여서 함께 먹을 수 없으니 포장 용기를 구입해서 한 그릇씩 포장하여 집집마다 배달하자는 의견이 나와서 논의하게 됐다.어차피 모이지는 못하는 상황이니 음식 준비를 동네 식당에 맡기고 배달만 역할을 나누자는 의견에 다들 동의하는 분위기
뜨거웠던 지난여름의 추억이 뭐냐고 물으면 단연코 참깨 수확이라고 말하렵니다. 지난 3일부터 근 보름 넘게 온통 참깨 농사에 매달렸습니다. 폭염이 한창 기승을 부렸던 시기였지요. 그때는 인격을 유지하며 일할 수 있는 시간이 아침저녁의 짧은 그 시간뿐인지라 그동안에 참깨를 베고 털고 말리고 키질을 하느라 영혼이 가출하는 듯했습니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넘길라치면 땀이 비 오듯 해서 더는 움직이기조차 어려웠습니다. 확실히 기후위기가 맞다고, 어떻게 이렇게 더울 수가 있냐고 투덜대면서도 꾸역꾸역 일했습니다. 대부분의 농민들이 농사일을 할 때
청년에서 장년으로, 이제 마흔을 앞둔 나이가 되었다. 농촌에서는 꽤 젊은 나이에 속하지만, 사실 불혹이라는 길 앞에 선 것이다. 매년 조금씩 시야가 넓어지고 깊어지는 것이 나이 드는 맛이라면, 여성농민으로 뿌리내리는 삶에서는 왠지 우물 안 개구리처럼 세계가 좁아지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지구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활동하라’는 구호를 가슴에 새겨보지만, 농사라는 작업 특성상 매일 익숙한 환경, 일정한 루틴, 평생을 한 마을 안에서 몇몇 아는 얼굴들 사이에만 있다 보니 작은 지역 사회 안으로 생각이 수렴되는 것 같다.성숙함이란 나이
농사를 짓다 보면 경제작물 외 다른 농사가 많기 마련이다. 양념이며 푸성귀 종류가 좀 많은가. 봄에 심어서 요즘 따 먹는 오이 호박 가지 고추 등등. 초가을에 배추를 비롯한 쪽파 무 당근을 파종하면 김장할 때 비용을 줄일 수 있다. 필요한 양념을 다 키워서 먹지는 못하더라도 소비가 많거나 애착이 가는 농사가 각자 다른 것 같다. 나의 경우는 풋고추와 풋호박 그리고 참깨 농사다.양념 농사는 파종하고 수확해서 입으로 들어오기까지 거의 여성농민의 수고로 이뤄진다(남편과 친하게 지내면 협조 정도가 다르다).거의 모든 밭작물이 물빠짐이 좋아
시골 동네에서 내 나이 정도 되면 삼촌 또래의 동네 어른들과 친한 오빠 동생 사이처럼 지내면서 말도 좀 편하게 하게 된다. 워낙 나이 드신 분이 많고, 젊은이들이 없으니 중간에 있는 나이대들은 그렇게 어울리게 되는 듯하다. 그렇게 만나면 한 톤 높은 목소리로 친근하게 근황과 농담을 주고받지만 그렇다고 딱히 진짜 친하지는 않은 동네 어른들이 있다. 그런 어른 중 한 명이 ‘아이고 우리 윤정이 시집갈 때 됐는데 살 좀 빼지 그러냐~’라며 엉덩이를 툭 친다. 순간 너무 당황해서 얼굴은 굳고 말문이 막힌다. 주변을 보니 다들 아무렇지도 않
1994년 11월 처음 농촌으로 왔을 때, 그때를 돌이켜 생각해보면 남녀 어른들의 지병이 조금 달랐습니다. 남성들은 주로 술이나 담배로 인한 간이나 폐 등의 질환이 많았고, 여성들은 예나 지금이나 무릎 등 근골격 질환 등의 고통을 많이 호소하셨습니다. 더 나이 든 분 중에는 뇌졸중으로 쓰러진 분들이 간혹 있어서 집에서 환자를 돌보느라 온 가족이 고생한다는 얘기들을 종종 듣고 보았습니다. 정확히 27년 후의 지금 농촌 풍경과는 사뭇 다른 풍경입니다. 뇌졸중 걸린 어른들은 집에서 모시는 경우는 거의 없다시피하고, 술 담배를 하는 사람들
지역에서 토종씨앗 모임을 시작한 지 5년차다. 여성농민회 언니들 특유의 바지런함과 추진력으로 12개 읍·면 수집조사를 마치고, 올해 드디어 씨앗도감 작업을 위해 채종포에서 증식 작물을 재배하며 기록하고 있다. 나눔 받은 토종씨앗은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하여 한 곳에만 심는 것이 아니라, 여럿이 나누어 기른다.나도 붉은어금니동부, 흰찰수수, 비단팥, 물레콩 등의 증식을 맡았다. 작물별로 자라나는 과정을 사진에 담는다. 재배특성과 모양은 고정되어 일정한 편이지만, 어떤 원인에 의하여 다른 특성이 튀어나오기도 하니 파종 날짜부터 개화,
보리타작을 하고 서둘러 모내기를 끝내자마자 뒷정리는 미뤄두고 호미를 들고 대파밭으로 갔다.잦은 비에 답례하느라고 풀들이 무성하게 자랐다. 오메! 징한 것들이다. 모내기 시작하면 한동안 밭에 올 수 없을 것을 예상하고 떡잎이 벌어지고 있는 풀까지 없앴는데 그 며칠 사이에 풀들이 도둑처럼 대파밭을 점령하고 있었다.아침 5시에 집을 나서서 오후 8시까지 대파밭을 걷다 보면 하루에 몇 km를 걷게 되는지 측정해 보지 않았지만 그냥 피곤하다. 만사가 귀찮다. 핸드폰이 울리는 소리도 반갑지가 않다. 오후 6시쯤에 친구가 전화를 했다. 모내기
1리에 사는 보람이는 3년 전 귀농해서 작년부터 차를 끌고 다니기 시작했다.3리에 사는 승미는 작년에 귀농과 동시에 면허를 따고 운전대를 잡았다.2리에 사는 나는 4년 전 귀농하면서 운전을 다시 배웠다. 우리는 각각 아이들을 위해서, 장을 보기 위해서, 교육을 받기 위해서 등의 이유로 운전을 시작했다.지난달 3리에 사는 중학교 동창 승미에게서 전화가 한 통 왔다. “나래 어머니 오늘 생신이야? 우리 동네에서 일하시다가 아버지가 바쁜 일이 생겨서 (차 끌고) 먼저 가셨다는데~ 어떡하지?” 서울 사는 동창 나래를 대신해서 어머니를 모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