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여기 있는 사우디 지도를 잘 보세요. 이쪽에 표시된 이 지역이 나푸드 사막인데 면적이 5만7,000평방킬로미터예요. 오른편에 있는 이 지역은 다나 사막이고, 남쪽에 있는 이곳이 바로 세계에서 가장 넓은 룹알할리 사막입니다. 그 면적이 한반도의 세 배나 되는 65만 평방킬로미터예요. 이 거대한 사막에서 모래바람이 일기 시작하면 갑자기 하늘이 깜깜해집니다. 돌풍에 모래만 날리는 게 아니에요. 돌멩이까지 섞여서 몰아친다니까요. 이런 경우 재빨리 현장 건물 안으로 대피를 하지 않으면 큰일 나요. 게다가 예고 없이 후끈후끈한 열풍이
아부지가 윗녘 나들이를 해야 하는 날이면 엄니는 새벽부터 바빴다. 우선 아부지가 입고 나갈 두루마기며 저고리며 한복바지를 내어다 마당의 빨랫줄에 걸었다. 그러고는 아궁이에서 숯불을 피워 다리미에 담았다.이윽고 엄니는 촉촉하게 이슬을 맞은 두루마기 등속을 걷어 마루로 가지고 와서는, 아직 단잠에 빠져있는 나를 불러 깨웠다. 맏이였으니까.“얼릉 일어나라. 느그 아부지 옷 좀 같이 대리자!”툴툴거리며 이불속을 빠져나온 나는 마루로 나와서 다리미를 든 엄니와 마주 앉았다. 두 손으로 두루마기 자락을 팽팽하게 당겨 잡아야 했다. 엄니는 왼손
1950년대 중반에 민영 텔레비전 방송국이 생겼다가 이후 수지를 맞추지 못해 문을 닫았고, 1957년 9월에는 주한미군방송(AFKN)이 텔레비전 방송을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본격적인 텔레비전 시대가 열린 것은 1961년 12월 31일에 국영 텔레비전 방송국인 KBS TV가 탄생하면서부터다.집집마다 텔레비전이라는 새로운 종(種)의 상전이 쳐들어와서 안방을 점령했으니(물론 초기에는 형편이 여유로운 집에서만 장만할 수 있었던 사치품이었지만), 당연히 새로 등장한 그 안주인의 질병을 치료해 줄 의사도 필요했다. 텔레비전을 가설하고
남해안 섬마을의 가난한 우리 집에도 라디오가 생겼다. 그것은 대단한 사건이었다.어느 해 꽃피던 봄날, 경주 이 씨 문중의 족보 정리 일을 하러 육지에 출장 나갔던 아부지가 그 신기한 물건을 사갖고 돌아오셨다. 1960년대 초반으로 어림한다. 적어도 내가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1963년 말 이후의 일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 해 10월 15일에 제5대 대통령선거가 있었는데 우리 집에 라디오가 없었으므로, 아부지는 만식이네 집에 가서 밤을 새워가며 개표방송을 듣고는, 풀죽은 모습을 하고 돌아왔던 것이다. 아부지가 말했다.-져부렀다. 윤보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부터 라디오를 제작해서 공산품으로 판매했을까?이런 저런 기록에 의하면 1957년에 에서 라디오를 생산 판매했던 것이 해방 후 첫 국산 라디오의 등장으로 올라있다. 물론 수신기의 부품을 수입해서 조립 판매한 것이었다. 바로 이어서 이듬해인 1958년에는 가 또한 라디오 생산 업체로 등장했다. 이때의 라디오는 건전지를 사용하는 게 아니라 전기에 꽂아 쓰도록 돼 있는 진공관식 라디오였다.우리에게 ‘전파사’ 관련 얘기들 들려주고 있는 이해중 씨의 경우 중학교 3학년 때이던 1959년에, 그의 집에 바로
1950년대 말, 충청도 부여의 한 자연마을.동네 확성기가 켜지더니 한동안 깨도 볶고 콩도 볶다가 이윽고 이장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아, 아, 마이크 시험 중. 아, 아…시방 내 목소리 나오는 것이여? 아, 나온다고? 에…주민 여러분께 본 부락 이장이 한 말씀 알려 드리겄습니다. 지난달에 신청했던 비료가 나왔으니께, 주민 여러분께서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시방 즉시로 마을회관으로 나와서 비료를 타 가시기 바라겄습니다. 그라고, 그저께 놓았던 쥐약은 하나도 남김없이 깨끗이 치워 주셔야겄습니다. 오늘 아침에 조성남 씨 집 개가 쥐약을
읍내 전파사의 진열창 바깥에 길 가던 사람들이 뭉텅이로 모여서 웅성거린다. 모두는 도로 쪽에 등을 보인 채 전파사의 안쪽을 향해 고개를 빼고 있다. 전파사에서 행인들을 위해 일부러 진열창 밖을 향해 놓아둔 흑백텔레비전을 구경하고 있는 것이다. 점차 열기가 달아올라서 어느 결에 웅성거림은 왁자함으로 바뀐다.-어? 타이거 마스크 저 놈, 반칙이야, 반칙!-저거 칼 아니야? 저놈이 뒤에서 흉기를 꺼냈어! 아이고 쓰러지고 말았네.-야, 김일이가 일어났다. 인제 넌 죽었다. 박치기를 해, 박치기!-에이, 갑자기 테레비가 왜 이래! 시방 김일
박정희 정권 말기인 1978년에 기공식의 삽을 떴던 과천의 서울대공원이, 전두환 정권 때인 1984년에 완공되었다. 그해에 창경원의 모든 동물들을 서울대공원 내에 조성된 동물원으로 옮겨 수용하였다. 드디어 창경궁은 ‘동물원으로서의 75년의 욕된 세월’을 마감하고 옛 조선 궁궐의 지위를 되찾았다.현재의 서울대공원은 전체면적이 240만 평인데, 그 중에서 88만 평을 동물원이 차지하고 있다. 옛 창경원 시절에 비하면 엄청난 면적이다. 그런데 애당초 계획했던 동물원 부지가 그 10분의 1에도 못 미치는 규모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동물박사’ 김정만 씨는 거의 평생을 야생동물들과 함께 살아왔으면서도, 유독 호랑이와 인연을 맺는 데에는 곡절이 많았다고 고백한다. 1955년도에 창경원에 들여왔던 호랑이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질병에 걸려서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1960년대 초에 금융조합(농협의 전신)에서 벵갈호랑이 암놈 두 마리를 창경원에 기증했다. 녀석들의 이름을 각각 ‘백두’와 ‘금강’으로 지어주었다. 병치레 하지 않고 건강한 편이어서 관람객들의 사랑을 받았는데, 문제는 발정기인 봄철만 되면 (‘시집 보내주지 않는다고’) 안정을 찾지 못 하고 심히 안달을 한
1960년대에 ‘출세한’ 자식을 만나러 서울에 올라갔다 온 사람들이 고향 사람들에게 늘어놓은 첫 번째 자랑거리는 물론 창경원 구경이었다. (‘화신백화점 구경’도 자랑거리이기는 했다.)특히 동물 중에서도 호랑이 등의 맹수를 보고 왔다는 자랑은, 아직 창경원에 안 가본 시골 사람들의 호기심과 부러움을 자극하기에 그만이었다. 하지만 이때 전달자의 화법이 중요하다.-야아, 황소보다 두 배나 큰 호랑이가 천둥소리 같은 포효를 내지르더니, 집채만한 바위를 단숨에 훌쩍 뛰어넘어서 내 앞에서 딱 내려앉아 입을 떠억 벌리는데….어차피 과장과 허풍을
동물 구경을 제외한다면, 나이 든 사람들이 ‘창경원’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 바로 ‘밤 벚꽃놀이’다. 그런데 창경원의 벚꽃놀이 행사가 이미 해방되기 20년 전부터 열려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왕년의 창경원 수의사 김정만 씨가 들려주는 벚꽃놀이 행사의 연원은 이러하다.“창경궁의 현판을 창경원으로 바꿔 달고 나서 2년이 지난 1911년에, 일본 놈들이 자기나라의 정신을 조선에 심는다며 창경원에다 대대적으로 벚나무 식목을 했어요. 자그마치 1,800주를 심은 겁니다. 그 나무들이 10년 남짓 자라니까 화사하게 꽃이 필
김정만이 처음 수의사로 부임했을 때, 창경원에는 박영달이라는 나이 많은 사육사가 있었다. 그는 ‘동물원이 생기기 이전의 옛 창경궁’에서 왕실의 마차를 몰던 마부였다. 그런데 조선 왕실에 자동차가 도입되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되었다가, 왕실의 주선으로 창경원에 취직을 한 것이다. 때문에 그는 비록 동물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은 없었으나, 창경원의 역사를 한 달음에 꿰고 있던 증인이었다.사무실의 책상서랍이며 서류함 따위를 다 뒤져봤지만 동물의 생태나 질병과 관련된 자료가 전무했으므로(해방 직후에 일본인 원장과 직원들이 모두 소각하
1958년 봄, 김정만이 대학졸업 후 수의사로서 첫 발령을 받은 곳이 바로 창경원이었다.-축하하네. 자네가 서울대 수의학과를 나온 재원이라는 소문은 익히 들었네. 어이, 이 선생, 김정만 씨 데리고 가서, 오늘 아침에 죽은 백곰 해부 좀 같이 하지.출근 첫날, 김정만은 원장의 지시에 따라서, 병에 걸려 죽은 백곰을 해부하기 위해 선배 수의사인 이영범을 따라나섰는데, 그때 두 사람이 나눈 대화가 이러했다.-그런데 백곰이 왜, 어쩌다 죽었는데요?-오진이야. 헛다리짚은 거지. 작년에도 사자 한 마리가 비실비실하기에, 소화기 장애인 줄 알
아니, 아주 오랫동안 동물원이었다.2001년 여름의 어느 토요일 오후, 모처럼 궁궐 나들이에 나섰다. 서울 종로구 와룡동에 자리한 창경궁.정문인 홍화문으로 들어가서 명정전 앞의 휑한 조정(朝廷)으로 곧장 향하지 않고 측면의 숲길로 들어서니, 궁궐 특유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즐기며 걷기에 더할 나위 없는 산책길이 벋어있다. 주말이었음에도 창경궁 숲길은 찾는 이가 많지 않아서, 복작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너무 고적하지도 않았다. 사람들은 혼자 혹은 두셋씩 드문드문하게 간격을 두고는 한정 없이 느릿느릿 고궁 오후를 걸었다.내게도 길동무가
1934년 11월 23일. 이 날은 영도 주민들이 섬사람에서 육지 사람으로 바뀌는 날이었다. 역사적인 영도다리의 개통식을 구경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당시 부산 전체의 인구가 15만이었는데, 이 날 행사를 구경하러 각지에서 몰려나온 사람이 줄잡아 6만여 명이었다. 다리의 개통식은 중구 쪽 들머리에서 열렸다.-자, 할아버지 할머니, 하나 둘 셋 하면 가위로 테이프를 딱 자르는 겁니다. 하나, 둘 셋! 부산시장 격인 부산부윤 쓰치야 덴사쿠(土屋傳作)와 나란히 서서 개통 테이프를 끊은 사람은 김해에서 온 갓 쓴 노인 부
‘하루에 몇 차례씩 시간을 정해놓고 대형 기선이 지나다닐 수 있도록, 다리의 상판 일부를 공중으로 들어 올리는 방식으로 설계했다, 이런 다리를 도개식 교량이라고 한다.’영도다리 건설을 앞두고 열린 설명회에서 설계 기술자가 그렇게 말한 이후로, 부산에서는 한 동안 ‘도개식(跳開式)’이라는 매우 낯선 한자말이 시민들의 입에 오르내렸다.압록강 철교의 경우 큰 배가 지날 때에는 다리 일부가 옆으로 젖혀지는 회전식 개폐 장치를 갖추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으나, 공중으로 들어 올린다는 말은 금시초문이었으므로, 배를 부리는 선주
영도에 다리를 놓아서 육지와 연결하겠다는 일제 당국의 계획이 구체화하자, 배를 부려 먹고사는 선주들이 격렬하게 저항을 하고 나섰다. 선주 중에서도 원양까지 나다니며 고기잡이를 해온 대형 어선 임자들의 반대가 특히 심했다.-우리 어선은 쓰시마까지 가서 고기잽이를 하는 큰 밴데, 다리가 생기모 영도 안쪽으로는 몬 지나 댕기고 저 배깥으로 한 바쿠를 삐잉 돌아 댕겨야 할 거 아이가. 그 기름 값을 행정관청에서 공짜로 대준다카드나?-다리 생기모 자갈치 시장이고 항구고 뭣이고 다 망한다카이.-작은 배는 교각 새다구로 끼어 댕길 수 있으이깨네
“식민지 시절에 일본군 기마병들이 말 타고 다니는 사진들 많이 봤지요? 그 기마대의 말들을 영도에서 기르고 관리했어요. 영도에 군마장이 두 개나 조성돼 있었거든요. 뿐만 아니라 일본의 관동을 출발한 선박이 중국대륙으로 진출하려면 함경도의 나진으로 올라가야 하잖아요. 그 대형 선박을 타고 부산부두에 들어온 일본군은, 반드시 태종대 쪽에 건설한 육군휴양소에 머물렀다가 나진으로 올라갔어요. 한 번에 만 명도 오고 이만 명도 왔지요. 게다가 태종대에 서치라이트부대, 고사포부대, 해안포기지까지 설치했는데….”영도의 향토사학자 부성수 씨의 얘
-한 마디로 말해서, 우리 대일본제국이 중국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조선반도의 해안에 그 전진기지가 필요한데, 군사 요새를 만들기에 이 곳 영도만한 적지가 따로 없습니다.-영도에 군사기지를 조성한다? 흐음, 어디 그 구체적인 계획을 한 번 설명해 보게.-자, 이 괘도에 보이는 그림이 영도의 지형을 확대한 것입니다. 여기 이 곳, 봉래와 영선동 일대에는 우리 천황폐하 군대의 군마 주둔지를 설치할 예정입니다. 또한 여기 보이는 이 쪽 태종산에는 육군 휴게소가 들어서게 됩니다. 이제부터가 아주 중요한데요, 저 쪽 해안 절벽 위에는 야간
영도의 본디 이름은 절영도다. 에는 ‘절영도’라는 섬 이름이 수도 없이 등장하고, 멀리는 열전편의 에도 올라있다. 그 섬은 예부터 말 기르는 곳으로 유명해서 일찍이 나라에서 관리하는 목장인 국마장(國馬場)이 있었다. 그런 탓으로 그 조그만 섬이, 국가대사를 기록해 놓은 역사문헌에도 빈번하게 등장할 정도로 대접을 받아왔다.이름의 유래가 재밌다. 그 섬에서 기르는 말은 워낙 준수한 명마여서, 일단 달음박질을 했다 하면 ‘그림자(影)’가 달리는 말을 따라잡지 못 하고 ‘끊어진다(絶)’ 하여, 섬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