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 말에 서울 변두리에서 세를 살았는데, 그때 단칸방 사글세 보증금이 5만원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같은 집에서 세를 살던 포천댁 아주머니가 5만 원짜리 낙찰계를 들지 않겠느냐고 은근하게 권하는 거예요. 낙찰계? 난생 첨 듣는 말이었어요. 영문 모르고 그러마했지요. 어쨌든 그 때 들었던 낙찰계의 곗돈을 탄 덕분에 사글세 보증금을 10만원으로 불려서, 방 2개짜리 집으로 이사를 갈 수 있었지요.”45년생 해방둥이인 박영임 할머니가 들려준 얘기다. 목돈 마련의 한 방법으로 한 때 대단히 성행했던 계가 이른바 낙찰계였다. 하지
계모임, 하면 우리는 먼저 가정주부들을 떠올린다. 그러나 주부들이 계를 꾸리기 시작한 내력은 별반 길지가 않다. 그렇게 된 배경을, 강원도 홍천이 고향인 1931년생 안영임 할머니는 이렇게 설명한다.“계를 묻으려면 여자들이 일단 모여서 이렇게 저렇게 하자, 하고 의논을 해야 할 것 아녜요. 그런데 양갓집에서는 젊은 여자는 밖으로 내보내질 않아요. 특히 강원도에서는, 여자는 들에도 나가지 않았어요. 밭 매는 것도 다 남자들이 했지.”이 할머니의 얘기대로 1950년대까지만 해도 여자들은 밖으로 나가서 무슨 모임을 만들어 활동을 할 엄두
무수한 이름의 계(契)들 중에서 그 내력이 매우 유구할 뿐만 아니라 시골의 전통마을에서 늦게까지 명맥을 이어왔던 계를 들자면, 단연 위친계일 것이다. 위친계(爲親契)는 글자 그대로 부모님을 위한 계였다.봄철, 무논에서 써레질을 하고 있는 용식이에게 마을 동무가 급히 달려와서 급보를 전한다.-길수네 조부님이 오늘 아침에 돌아가셨다는데 아직 소식 못 들었나?-아, 그래? 길수가 우리 위친계 계원인데…아이고, 지금 써레질이 문제가 아니지.-어서 가보라구. 자네가 우리 위친계 유사가 아닌가.용식이가 서둘러 써레를 딴 사람에게 넘기고는, 흙
강원도 정선군 동면 백전리에서는 여느 마을과는 달리, 집집마다 절구를 갖고 있지도 않았고 디딜방아도 없었다. 마을 어귀에 있는 물레방아가 곡식을 빻고 찧는 일을 도맡아 해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물레방아가 저절로 생긴 것은 아니다. 흐르는 물길을 돌리고 모아 한 곳으로 떨어지게 만드는 작업이야 기본이고, 나무를 베어다 자르고 깎고 못질해서 물레를 짓고, 석수장이에게 돌확을 주문해서 앉히고, 절구 공이를 깎고, 방앗간 건물을 짓고…여럿이 협업을 하지 않으면 엄두를 못 낼 일이었다.-몇몇 사람의 힘으로 될 일이 아니니까, 사람을 모아서
-엄마는 어디 가셨니?-오늘 계모임 있다고 나가셨어요.이렇게 써놓고 보니 어째 좀 생경하다. 격세지감이 든다. 하지만 이런 문답이 “엄마는 친구분들하고 찜질방 가셨어요”라는 말 만큼이나 자연스럽던, 일상의 언어인 적이 있었다. 그렇다고 계모임을 주부들만 가지라는 법은 없었다,1960년대, 혹은 70년대의 어느 여자고등학교 교실, 쉬는 시간에 몇몇이 한 학생의 주위로 몰려와서는 무엇인가를 보여 달라고 조른다.-얘, 순애야! 니들 이번에 무슨 기념반지 맞췄다며? 어디 구경 좀 하자.-금반지야? 아니, 혹시 이수일이한테 금강석인지 다이아
배 목수 이봉수는 스물네 살 때 해방을 맞았다. 그러나 나라가 일제치하에서 독립됐다고 해서 배 짓는 목수의 길로 출발한 그의 진로가 달라질 이유가 없었다.이봉수가 만들었던 선박 중에는 ‘넓적배’라는 것도 있었다. 해방되던 해에 강원도 정선에서 그 일을 했다. 강 이 편과 저 편에 밧줄을 연결해놓고, 그 줄을 잡아당겨서 배에 탄 사람들이나 자동차를 건네주는, 배라기보다는 ‘움직이는 다리’ 같은 것이었다. 그는 정선에서의 경험을 이렇게 털어놓았다.“전나무를 베어서 그 넓적배를 만들었는데 가장 힘든 일은 벌목이었지요. ‘잉걸꾼’이라고도
-봉수야! 아니 이봉수 목수, 축하한다! 자, 수료증이다!이봉수가 드디어 3년의 수련과정을 모두 마치고 견습생 딱지를 떼는 날이다. 밤섬의 율도조선소 소장이 자신의 직인이 큼지막하게 찍힌 수료증을 수여하였다. 목수 자격증이다.무술연마를 마친 수제자에게 사부가 검을 하사하듯, 3년간의 수련과정을 마친 사람에게 조선소 측에서 잊지 않고 챙겨주는 것이 수료증 말고 또 있었다. 목공에 필요한 연장 일습이었다.“톱‧대패‧끌‧망치부터 시작해서 치수 재는 자에 이르기까지 크기별, 종류별로 구색을 갖춘 연장 한 벌을 주더라고요. 배 목수로 밥벌이
밤섬의 율도조선소에서 뚝딱뚝딱 풍선 한 척이 모양을 갖추어간다. 그 무렵이면, 들고나는 사람들로, 배 짓는 현장만큼이나 부산해지는 곳이 또 있었다. 율도조선소에 한선 한 척을 지어달라고 주문해 놓은, 행주나루 근방의 선주(船主)네 자택이다,-일산에 진흙 파러 간 인부들은 아직 소식이 없나?-주인어른, 저쪽 산모퉁이에 진흙 실은 마차가 오고 있습니다요.-으음, 그래? 광목은 제대로 끊어왔겠지?-그럼요. 돛 만드는 기술자 김 씨가 적어준 치수대로, 모자라지 않게 끊어다놨구먼요.-선박 인수 날짜 며칠 안 남았으니 서둘러야겠어. 가마솥에
밤섬의 율도조선소에서 제작했던 한선(韓船)은, 멀리 강원도의 정선 일대에서 벌목한 아름드리 소나무를 재료로 삼았다. 야산 언덕에서 벌목꾼들에 의해 베어진 소나무들은 일정한 길이로 잘려서 물가로 운반되고, 거기서 다시 다른 원목들과 합쳐져서 뗏목으로 엮인다.뗏목 위에 올라서 삿대를 짚어가며 강을 타고 내려오는 그 사람을 떼꾼, 혹은 뗏사공이라 불렀는데 크기에 따라 뗏목 하나에 두 명이 타기도 하고 네 명의 떼꾼들이 올라타기도 했다. 그 떼꾼들이 뗏목을 엮어 타고 출발하는 곳이 바로 정선의 아우라지 나루였다.아우라지를 출발한 뗏목이 최
일제 강점기였던 1938년의 어느 봄날, 한강 밤섬의 배 만드는 공장(조선소)에 열아홉 살짜리 견습공 하나가 처음으로 출근하였다. 이 신출내기 견습공이 쭈뼛거리며 작업장으로 들어섰으나, 그러거나 말거나 목수들은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나무를 나르고 톱질을 하고 못질을 하는 등 제 할 일에 바빴다. 이윽고 이 청년이 목청을 가다듬더니 차렷 자세를 하고는 큰 소리로 또박또박 외친다.-저는, 배 짓는, 목수, 기술을, 배우려고, 온, 방년, 19세, 이봉수, 라고, 합니다!그 때에야 작업 중이던 사람들이 소리 나는 쪽을 돌아보고는 짧게
밤섬은, 엄밀히 말하면, 본시 섬이 아니었다. 밤섬의 한 쪽 면이 육지인 영등포와 연결돼 있었기 때문이다. 한강에 돌출한 이 밤섬 포구는 마포나루를 드나들던 어선이나 상선들이 거쳐 가던 주요한 길목이었다.밤섬포구와 마포나루는 지척 간이었는데, 양쪽을 오가는 나룻배가 따로 있었다. 우리에게 밤섬의 이모저모를 증언해줄 배(船) 목수 이봉수 씨는, 1920년대에 당시의 화폐로 10환을 나룻배의 선가로 받았다고 증언한다. 20년대 중반 무렵까지만 해도 밤섬에는 200여 호의 주민들이 살고 있었다.그랬는데 1925년 여름, 임진강과 한강유역
강변도로를 따라 서울 여의도 근처를 지나본 사람이면 마포대교와 서강대교 사이에, 마치 두 개의 밤알 모양을 한 채 수풀로 덮여 있는 조그만 섬을 곁눈질로나마 바라본 적이 있을 것이다. 도심 속 새들의 천국이라 일컬어지는 밤섬이다.서울시에 의해 생태계 보전지역으로 지정된 이 밤섬에는 천연기념물 황조롱이와 쇠부엉이를 비롯한 수많은 철새들이 날아들고 붕어, 뱀장어, 쏘가리 등의 어류가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어서 도심 속의 생태공원으로 시민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그런데 바로 이 밤섬이 1960년대 말까지만 해도 주민들이 440여 명이
편지가 왔다.고국의 가족으로부터 두 달 남짓 동안이나 소식이 끊겨서 어깨가 바닥까지 처져 지내던 사우디의 건설 노동자 박기출 씨에게, 드디어 고향에서 편지가 왔다. 그에게 고민 상담을 해주었던 공사현장의 김 주임도, 박 씨에게 편지를 전하면서 덩달아 기뻐서 가슴을 쓸어내렸다.그런데 김 주임이 외출했다 돌아와 보니 박 씨는 거의 혼이 나가 있었다.-기출씨, 왜 이래? 참, 아까 고향에서 편지 왔었잖아. 부인한테서 온 것 아녔어?-이 편지…마누라가 아니라…동네 사시는 당숙님께서…그런데 우리 집사람이…박기출 씨는 울음을 삼키느라 말을 잇
사우디아라비아 중부에 있는 ‘카미스’의 장교숙소 건설 현장. 누군가는 수평계로 수평을 잡고, 목수들은 콘크리트 타설을 위한 거푸집을 짜고, 다른 한쪽에서는 철근작업을 하는 등 건축물의 기초공사가 한창이었는데…. 갑자기 현장 소장이 메가폰을 켜더니 다급하게 소리친다.-모든 인부들은 작업을 중지하고 신속하게 버스에 올라타라! 지금 서쪽에서 모래 폭풍이 몰려오고 있다. 죽고 싶지 않으면 빨리빨리 움직여!국내에서 민방공 훈련할 때에는 세월아 네월아 꾸무적대던 사람들이, 현장 소장의 입에서 ‘모래 폭풍’ 한 마디가 떨어지자, 불난 강변에 덴
작업이 없는 일요일이다. 인부들이 모처럼 외출복으로 갈아입고서 삼삼오오 무리지어, 현장에서 2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시장으로 쇼핑을 나간다.모든 급여는 기본적으로 한국에 있는 가족의 통장으로 입금되기 때문에, 담배를 비롯하여 기초적인 생활필수품을 구입하려면 가불을 해야 했다. 한 달 동안 일한 실적에 따라서 개인별로 지급받는 급여에 차이가 있는 것처럼, 가불을 할 수 있는 금액도 개인차가 있었다. 하지만 어떤 경우든 500리얄(한화로 약 10만원)을 넘을 수는 없었다.쇼핑을 마치고 돌아온 인부들이 숙소에 풀어놓은 꾸러미들이 볼 만하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중부 ‘카미스’ 지역에 대규모 군대막사를 건설하는 한국 건설업체의 공사현장.군 시설물 중 장교 숙소(BOQ)로 쓰일 건물이 완공단계에 접어들어서, 마지막 페인트 작업을 남겨두고 있다. 마침 그 공기(工期)에 맞춰 한국에서 날아간 도장공들이 아침, 작업출동을 준비하고 있다. 담당주임이 작업지시를 내린다.-제1조가 다섯 명이지요? 비오큐 A동부터 작업 들어갑니다. A동은 200시간이 할당됐으니까, 자재창고에 가서 페인트 수령한 다음에 곧바로 현장 출동하세요.비오큐 한 동을 페인트칠하는 데에 200시간이 할당되었다는 말은
1980년 여름, 한진건설의 하청업체 직원인 김윤억 씨가 한국에서 선발한 30여 명의 건설노동자들(페인트공)을 인솔하여 사우디아라비아의 리야드 공항에 도착했다.사우디에 첫발을 내디딘 한국인들은 너나없이, 우선 맹렬한 기세로 정수리에 내리꽂히다시피 한, 송곳 같은 햇볕에 기가 꺾였다. 여름철의 평균 최고기온이 40도를 훌쩍 넘었다.하지만 그 지역은 습도가 낮기 때문에, 제아무리 불볕더위가 내리쬐는 날에도 그늘에만 들어갔다 하면 거짓말같이 시원하더라는 게 공통적인 체험담이다.노동자들을 태운 버스가 리야드 공항에서 두 시간 가량을 달린
중동 현장에 파견할 건설 노동자들은 실기 시험 과정에서 확인된 실력에 따라서 이른바 ‘식읍’이라는 것을 부여받았다. 왕년에 사우디 현장에서 도장공으로 일했던 김윤억 씨로부터 그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그것이 시간 단위로 계산한 노임, 즉 시급(時給)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식읍(食邑)이라 했다. 전통시대에 왕족이나 공신들에게 일정 지역의 조세를 받아쓰게 했던 그 ‘식읍’이라는 말을 누가 거기에다 끌어다 쓸 발상을 했는지 좀 흥미롭다.말하자면 식읍은 노동자 개개인이 지닌 해당분야의 기능을 수준별로 나눠 매긴 등급이다. 같은
1970년대 중반 이후에 대대적인 중동 건설 붐이 일면서 노동자들이 대거 사우디 등의 현장으로 몰려갔다. 하지만 가고 싶다고 누구나 무차별로 비행기를 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별다른 기술이 없어서 잡역부로 신청해서 가는 경우도 있었으나 일정부분 기술을 습득한 기능공하고는 급여의 차이가 컸다.가령 주택건설 현장만 해도 타일, 도장(페인트), 미장, 조적(組積, 벽돌 쌓기), 배관, 철근, 목공…등 다양한 분야의 기능을 갖춘 인력이 필요했고 또한 기업체마다 현장 사정에 따라서, 혹은 시기별로 분야별 선발인원이 정해져 있었기 때
-자, 여기 있는 사우디 지도를 잘 보세요. 이쪽에 표시된 이 지역이 나푸드 사막인데 면적이 5만7,000평방킬로미터예요. 오른편에 있는 이 지역은 다나 사막이고, 남쪽에 있는 이곳이 바로 세계에서 가장 넓은 룹알할리 사막입니다. 그 면적이 한반도의 세 배나 되는 65만 평방킬로미터예요. 이 거대한 사막에서 모래바람이 일기 시작하면 갑자기 하늘이 깜깜해집니다. 돌풍에 모래만 날리는 게 아니에요. 돌멩이까지 섞여서 몰아친다니까요. 이런 경우 재빨리 현장 건물 안으로 대피를 하지 않으면 큰일 나요. 게다가 예고 없이 후끈후끈한 열풍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