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의 긴 장마에 잦은 가을비까지 더해져 올해 지리산의 단풍 농사는 영 시원찮다. 단풍나무류의 단풍은 그 어느 해보다 우중충한 민낯으로 가을을 맞았다.광합성에 최적화된 초록잎으로 화장을 하고는 햇빛을 열심히 흡수하던 나무들은 이제 동파 방지를 위해 물길을 닫았고 제 몸속에 지니고 있던 본색을 드러낸 뒤 제 가진 것을 하나둘 땅으로 돌려보내면서 긴 월동을 준비한다.단풍 농사가 흉작인 숲에서도 은행나무가 있어 그나마 지리산의 가을 풍경을 남길 수 있음에 여간 다행스럽지 않다.하지만 이 은행나무 단풍을 사진으로 남기기가 결코 쉬운 일
지리산에서 실상사가 갖는 의미는 아주 각별하다. 지리산 생명 평화 운동의 시작점이자 중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엄숙 진지함보다는 마을 가운데 자리하고는 스스럼없이 편안하게 다가갈 수 있는, 이웃 같은 절집으로 느껴지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하지만 지리산이 위태로울 땐 저항의 구심점이 되어 지리산의 사람들이 모이게 하는 역할을 자임해 온 것도 실상사였다.이 가을날, 지리산 운동의 심장 그 실상사가 지리산프로젝트란 이름을 달고 울타리 없는 미술관이 되었다. 그림, 사진, 설치미술 등등 다양한 모습으로 실상사 곳곳을 장식하면서
참으로 힘들었던 여름은 그 꼬리를 감추고 언제나 단명인 가을이 서서히 지리산을 물들이고 있다. 이번 여름이 가장 덜 더운 여름으로 기록될 거라 했고 극한호우란 단어가 등장했던 올여름, 유난히 더웠고 또 비는 얼마나 오랫동안 그리고 많이 쏟아부었던가. 그럼에도 지리산의 들녘엔 알곡들이 여물면서 단순한 식량 그 이상의 무게로 벼들이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초봄 모를 준비하고 논물 대면서 시작하는 벼농사, 식량은 기본이고 가장 생태적인 저수지에 청정 산소를 생산하는 초록 공장 역할을 하는 우리들의 오래된 미래다. 게다가 봄부터 가을 그리
지난 14일과 15일 이틀 동안 경남 산청에서 ‘함께평화’가 준비한 함께평화영화제가 열렸고 필자는 부대행사로 ‘지리산을 그대로’라는 이름으로 사진전을 진행했다. 행사의 일환으로 작품 판매 수익금은 전액 함께평화에 후원을 했다.‘함께평화’는 산청 주민들 스스로 모금을 통해서 3년 전인 2020년 8월 14일 산청읍에 평화의 소녀상을 세우고 그 평화의 정신을 이어나가고 있는 주민들의 자발적 모임으로 작년에 이어 두 번째 영화제를 개최했는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일 행사의 일환이었다.이번 전시회는 개인적으로 세 번째 ‘지리산을 그대
지리산엔 아흔아홉골이 있다고 하듯이 수많은 계곡이 있고 그 계곡을 따라 골골의 물이 모이고 또 모여 강을 이루고 그 강물은 바다로 바다로 흘러간다. 계곡을 끼고 걷는 길들은 숲의 기운과 함께 물이 흐르면서 발생하는 음이온까지 더해져 더 쾌적한 발걸음이 된다. 무더운 여름철에 부담 없이 편안하게 걸을 수 있는 지리산의 계곡길들을 소개한다.남원 구룡계곡길남원 8경 중 제1경인 구룡폭포를 만날 수 있는 구룡계곡길은 지리산국립공원 전북사무소가 있는 주천면 호경리 육모정에서 덕치리 구룡계곡까지 펼쳐지는 심산유곡으로 길이가 약 3㎞ 정도다.
경남 하동 횡천에서 청학동 가는 길, 청암면에 있는 청암중학교 들머리에 커다란 돌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큰 산 아래 큰 인물 난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지리산 사람들에게 지리산이 어떤 의미로 자리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게 아닐까 싶다.지리산 아흔아홉골 그중에도 가장 명당자리에 학교가 있었고 그 학교는 마을의 구심점이 되기도 했지만 인구 절벽의 시대를 증명하듯 숱한 학교들이 문을 닫거나 또 합쳐지고 있는 게 지금의 현실이다.그렇지만 여전히 학교는 지속 가능한 우리들의 미래를 보장해줄 첫 단추임은 분명하다. 그런 의미에서
해마다 오월 초순이면 한반도의 남쪽부터 꽃을 피우며 북상하는 철쭉은 이 땅의 봄이 깊어간다는 걸 알리는 파수꾼이다. 이즈음 지리산 자락 바래봉과 형제봉에서 철쭉제가 열린다. 하지만 필자는 철쭉이 활짝 필 무렵이면 뒷동산 마실 가듯이 황매산을 오른다.그것도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에 오른다. 철쭉을 배경으로 황매평원에서 바라보는 지리산 천왕봉을 감상하기 위해서다. 노을에 물들어 가는 장쾌한 지리산 주 능선을 바라보는 그 감동은 말로써 형언하기 어렵다. 멀찍이 떨어져서 바라볼 때 더 아름다운 지리산임을 확인할 수 있다.철쭉의 어원은 한자
경남 하동군 청암면에 자리한 하동호는 1985년 1월에 착공하여 1993년 11월에 준공한 농업용 댐으로 청학동 계곡과 묵계 계곡의 물들이 흘러들어 거대한 산중호수를 만들었다. 지리산 둘레길 10구간과 11구간이 연결되는 지점에 있는 이 하동호를 한 바퀴 도는 하동호 둘레길이 새 단장을 하고 2000년 봄에 완성되었다.전체 길이 7.5km에 수평의 길이라 남녀노소 누구나 편안하게 걸을 수 있는 둘레길이 된 것이다. 하지만 지리산 둘레길 구간에는 포함되지는 않은 상태다. 이 하동호 둘레길이 가장 아름다운 계절은 뭐니 뭐니 해도 아름드
지리산의 봄은 코로나19 파동과는 무관하게 해마다 연초록 새순과 온갖 꽃들로 숲을 화려하게 장식해 왔지만 이번 봄은 2020년 이후 마스크로부터 해방된 첫봄인지라 가는 곳마다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코로나로 인한 그동안의 억눌림을 봄꽃으로 보상받으려는 심리가 충분히 이해가 가기도 한다.특히 섬진강 매화마을이나 구례 산수유마을 그리고 홍매로 유명한 화엄사는 말 그대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는 2023년의 봄이다. 그리고 만나기 힘들긴 하지만 봄의 진객인 노루귀나 바람꽃 등을 찾아 깊은 산속을 헤매는 들꽃 애호가들이 SNS에 올리는 화려
10.29 참사로 인해 지리산 곳곳 이름난 단풍 명소들의 화려한 단풍 풍경을 예전처럼 마냥 아름답게 볼 수만 없는 가을의 끝자락이다. 엄밀히 말하면 단풍은 물드는 게 아니라 본색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더 많은 광합성을 하기 위해 녹색으로 위장을 하고 있다가 월동을 위해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과정인 것이다.그리곤 나무들은 제 가진 것 죄다 땅으로 되돌려 보내고 한겨울을 꿋꿋이 견디면서 봄을 기다린다. 수많은 생명들이 어처구니없는 죽음으로 내몰린 이 슬픔의 계절에 붉디붉은 단풍잎들의 화려한 사진을 차마 올릴 수가 없다.
백일동안 붉은 꽃을 피운다는 배롱나무. 꽃 한 송이 한 송이보다는 모여 핀 꽃과 수형이 아름다워 거리를 두고 바라볼 때 그 진가를 알 수 있는 배롱나무는 7월부터 꽃을 피워 가을로 접어드는 9월 말까지 꽃을 매달고 있으니 결코 여름꽃이라고만 할 수가 없다. 본격적 가을로 접어들 때 비로소 그 붉은 꽃들을 모두 떨구어 내기 때문이다. 지난여름, 그토록 정열적으로 꽃을 피웠던 지리산의 배롱나무들을 떠올리며 언제나 단명인 가을을 예감해 본다.
그 품이 넓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지리산은 아흔아홉의 골짜기가 있다고 한다. 그 골짜기마다 크고 작은 폭포들이 즐비하다. 그중엔 ‘지리십경’에 포함된 불일폭포처럼 이름난 폭포도 있지만, 폭우가 내린 뒤에만 나타난다는 제주의 엉또폭포처럼 지리산 아흔아홉골에도 온 산을 적시는 비 내린 다음엔 이름 없는 폭포들이 나 보란 듯 숱하게 나타난다.수직 낙하하는 물줄기들은 죽비가 되어 우리들의 어깨를 때리고는 섬진강이 되고 엄천강이 되고 덕천강이 되어 바다로 바다로 향한다. 지난여름 우리들의 정신을 번쩍 들게 했던 지리산의 폭포들을 떠올리며
인디언식으론 ‘열매가 빛을 저장하는 달’인 7월, 지리산의 계곡을 찾아 발을 담그며 무더위를 식혀 보았다. 하지만 지리산의 계곡들은 둘레길이든 자락길이든 숲길을 걸으며 땀 흘리고 난 다음에 만나야 더 짜릿하고 계곡물의 참맛을 느낄 수 있다.아흔아홉골 지리산엔 그만큼의 크고 작은 계곡들이 있어 지리산을 찾는 이들에게 또 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비록 역대급 가뭄이었지만 그래도 지리산의 계곡들은 결코 마르는 일은 없다. 계곡의 물은 쉼 없이 흘러 엄천강이 되고 경호강이 되고 덕천강이 되고 섬진강이 되어 바다로 바다로 향한다.올여름, 여
겨울 가뭄에 이어 역대급 봄 가뭄이 계속되고 있는 지리산의 6월, 오랜 세월 유장하게 흐르던 지리산의 강들도 가뭄에 몸살을 앓고 있다. 한때 지리산 댐 건설 논란으로 하마터면 수장될 뻔했던 엄천강 용유담의 거북바위도 배를 수면 위로 드러낸 채 가뭄의 심각성을 눈으로 확인하게 한다. 산은 강을 건너지 않고 강은 산을 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던가.지리산 골골 계곡물들은 북쪽 엄천강과 람천, 동쪽 경호강과 덕천강, 남쪽 섬진강을 지나 바다로, 바다로 향한다. 강물은 막힘 없이 흐르고 강가의 모래와 자갈 그리고 온갖 수생식물들이 어울릴 때
인디언들이 ‘오래전 죽은 자를 생각하는 달’이라 부르는 5월, 지리산 자락의 들녘은 무척 바쁜 달이다. 논에 물을 대고 모판을 준비하고 모내기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유달리 심했던 겨울 가뭄에 이어 계속되는 봄 가뭄에 절대적으로 물이 부족하지만 어렵게 어렵게 논에 물을 채우고 모내기는 시작되었다.지리산 자락의 논들, 특히 다랑논에 모가 심어지는 걸 보면서 식량에, 경관에, 저수지에, 산소공장 역할까지 이 엄중한 기후위기의 시대에 논은 확실한 멀티플레이어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논 위의 농부들은 아티스트임이 분명하다.그런 의미에
지리산 둘레길이 이어주는 남원-함양-산청-하동-구례 5개 시·군에 장수군까지 아우르는 ‘지리산권 특별지방자치단체’ 설치 추진을 위한 지리산권 지방의회 의장단 간담회가 지난 3월 전북 남원에서 열렸다. 하지만 지리산권의 시민사회단체들은 오래전부터 지역적 경계를 허물자는 ‘지리산공동체’를 꿈꾸며 많은 노력을 해왔는데, 그 지리산공동체의 일면을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지리산 자락의 오일장이다.장 보따리를 바리바리 챙겨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지리산 골골 사람들이 모이는 오일장 중에 필자는 산청장(1/6), 단성장(0/5), 인월장(3/8)
지리산의 골골 물들이 엄천강, 경호강, 덕천강을 지나 남강이 되고 그 강물들이 모이는 진양호, 그 진양호에서 봄의 기운을 머금은 푸른 지리산 능선을 바라보다. 동쪽 끝 웅석봉에서부터 서쪽 노고단까지의 그 장쾌한 능선이 진양호 푸른 물빛과 깔맞춤했다. 우수 즈음, 지리산에서 만난 봄의 전령사들을 소개한다.섣달에 핀다는 납매섣달 ‘납(臘)’에 매화 ‘매(梅)’ 납매를 성철스님 생가가 있는 산청 겁외사 근처 묵곡생태숲에서 만났다. 납매는 장미과인 매화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꽃받침과로 노란 꽃과 은은한 향기가 겨울에 찾아온 손님 같다고 해
우리나라의 당산나무에 대한 전통은 참으로 소중하고 또 잘 이어가야 할 소중한 문화 자산이란 생각이다. 마을 초입이나 들판 가운데서 농사일에 지친 농민들에겐 새참과 휴식의 장소로, 아이들에겐 놀이터가 되어주던 당산나무는 마을 사람들의 소통 공간이기도 했다. 당산나무의 너른 그늘은 말 그대로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해줬다. 긴 세월 동안 마을과 들녘을 굽어살피며 주민들의 안녕을 지켜주고 있는 지리산 자락의 그 나무 어르신들을 소개한다.
[한국농정신문 한승호 기자]하우스 내의 온도, 습도, 조도 등을 알려주는 시스템 계기판엔 명확히 34도가 찍혀 있었다. 갑작스레 찾아온 꽃샘추위 탓에 몸도 얼고 장비도 언 탓인지 하우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안경과 카메라 렌즈에 뿌옇게 서리가 끼였다. 융으로 닦아내도 그때뿐이었다.하우스 온도에 적응할 겸 잠시 뜸을 들이며 전방을 살피자 길이가 100여 미터 되는 하우스의 끝에서 한 농부가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다가가보니 이미 땀범벅이었다. 참외를 따기 위해 두둑으로 허리를 숙일 때마다 얼굴에 송골송골 맺힌 땀이 후드득 떨어졌다.
[한국농정신문 한승호 기자]무밭 3,000평을 갈아엎는 데 필요한 시간은 1시간여 남짓이었다. 트랙터 후미에 달린 쟁기가 빠르게 회전하며 밭을 ‘뚜드리자(농민들은 갈아엎는다는 말 대신 뚜드린다고 했다)’ 수확을 앞둔 무가 산산조각 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생생한 무청이 시퍼렇게 펼쳐진 밭은 순식간에 으깨진 무와 흙이 범벅된 쑥대밭으로 변했다.지난 13일 올해 경작 면적 7,000평 중 절반에 약간 못 미치는 면적을 갈아엎은 김병만(65, 제주도 서귀포시 성산읍 삼달리)씨는 “워낙 가격도 없고 불안정하니…”라며 말을 채 잇지 못했다. 시름 깊던 그의 눈은 매서운 한파와 바람이 몰아닥친 제주의 겨울 날씨만큼이나 을씨년스럽게 변해버린 무밭을 응시할 뿐이었다.앞서 제주월동무생산자협의회는 농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