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스레 돌아다니기 좋아하는 고만고만한 나이의 사내아이들이라고 해도, 무시로 산에 들어가서 휘젓고 다녔던 건 아니었다. 가령 6교시까지 공부를 해야 하는 국민학교 고학년의 경우, 수업이 파하고 집에 돌아오면 해가 서산 능선에서 몇 뼘밖에 남지 않은 시각이므로, 산행은 주로 반공일인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이루어졌다. 어린아이라도 세 끼 밥값은 해야 했다.-망태 메고 산에 가서 솔방울 좀 주워 오너라.-뒷산에 가서 토끼 먹일 꼴이나 한 망태 베어 오너라.-외양간에 매둔 소 끌고 나가서 배가 불룩하게 좀 먹이고 오너라.그런 경우 기쁜 마음
“요새야 묵을 것 천진디, 누가 봄철에 산에 가서 참꽃 그런 것을 따묵간디. 그 시절에야 하도 묵을 것이 없었응께 헛짓거리 삼아서 고것이래도 따묵었는디, 그래봤자 배만 더 고파. 그래서 사람들이 그런 말을 했어. 참꽃밭에 가면 배고파 죽고 칡밭에 가면 배 터져 죽는다고….”전남 강진을 고향으로 둔 1947년생 장귀례 할머니의 얘기다. 참꽃밭에 가면 배고파 죽는다는 말은, 진달래꽃 그거 따먹어 봐야 허기를 면하는 데에는 도움이 안 된다는 의미일 터이다. 하지만 칡은 배고픔을 조금쯤 이겨낼 수 있게 해주는 먹을거리였다.칡은 새로 잎이
산에서 나는 열매라고 해서 어느 지방에나 다 있는 것은 아니다. 강진 출신의 장귀례 할머니가 구수한 남녘 사투리에 버무려서 설명하는 이 열매는 어떤 것인지 들어보자.“산에서 볼개를 따갖고 오는디 많이 따면 바구리가 반절은 차게 따제. 동네 사람들이 바구리 들여다보고 자꼬 주래싸면 아까라 안 하고 한 주먹씩 나눠줘. 집에 오면 온 식구가 둘러앙저서 한 볼태기씩 묵는디, 씨는 따로 볼카내야 돼. 씨까지 다 묵으면 낭중에 똥이 안 나와. 씨는 따로 모태놨다가 삶어서 몰례 갖고 까묵으면 고소해서 묵을만해.”할머니가 얘기한 ‘볼개’는 보리수
대개는 아이들이 나무를 하러 가거나 소를(소 풀을) 뜯기러 가서 이런저런 열매를 보이는 대로 따 먹지만, 일삼아 군것질거리를 찾아서 산에 들기도 했다. 그럴 땐 목표를 정하고 간다.-나, 딸기 어디 많이 있는지 안다. 지난번에 형이랑 가서 딸기밭 맞춰놨거든. 나만 따라와.오늘은 딸기가 목표다. 길수는 딸기밭을 점 찍어놨다고 했는데, 송남이가 고개를 갸웃한다.-어딜 가자고 그래. 딸기 여기도 많잖아. 봐, 여기도 저기도 온통 딸기밭인데?-바보야 여기 있는 이것들은 다 뱀딸기야. 형이 그러는데, 뱀딸기 먹으면 죽는댔어.-죽는다고? 지난
누에의 먹이를 마련하기 위해서 밭에다 재배하는 뽕나무는 키가 썩 크지 않아서, 어린아이들도 가지를 당겨서 열매(오디)를 어렵잖게 따먹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산이나 길가에 자생한 뽕나무는 대부분 까마득한 높이의 거목이어서, 동무의 목말을 타고 올라 손을 뻗어 봐야 턱없이 못 미쳤다.-내가 올라갈 테니까 좀 받쳐 줘.사내아이 하나가 동무들의 도움을 받아서, 아름드리나무 밑동을 두 팔로 부둥켜안고는 안간힘을 다해 나무를 오르기 시작한다. 뽕나무는 직선으로 곧게 뻗어 올라가는 수종이 아니라 이리저리 가지가 갈라져 자라기 때문에, 어른 키
1960년대 말의 어느 봄날, 서울 남산 들머리에 위치한 국민학교 교정에 끝 종이 울려 퍼진다. 6교시 수업이 파했다. 종례를 마친 아이들이 운동장으로 쏟아져 나온다. 경상도에서 전학 온 지 얼마 안 된 사내아이가, 나란히 걷던 두 동무에게 다소 엉뚱한 제안을 한다.-건용아, 재도야, 오늘 저어게 남산으로 아카시아꽃 따 무러 안 갈 끼가?건용이와 재도가 얼굴을 마주 보며 한바탕 웃는다. 경부선 열차에서 막 내린 듯, 싱싱하게 굼틀거리는 전학생 아이의 사투리 억양이 재미나서 웃었으나, 그것만 우스운 것은 아니었다.-뭐라고? 아카시아꽃
-음반을 내겠다니 갑자기 무슨 소리야? 하기야…이다음에 늙어서 ‘나는 쇼단의 무용수였다’ 하는 것보다는 그래도 ‘가수였다’고 기억하는 게 낫겠지. 그럼 ‘기념 판’으로 몇 장만 내자.-나한테 필요한 것은 노후의 추억거리가 아니에요. 여러 말 말고 곡을 받아서 일단 취입만 하게 해줘요. 레코드 회사를 섭외하는 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허허, 참. 당신 나이가 서른일곱이야. 팔팔한 젊은 애들이 수두룩한데 어느 회사에서 당신을 신인가수라고 레코드 만들어서 홍보해 주겠어?-당신, 내 꿈이 가수라는 것 잘 알잖아요. 그리고 내 고집이 얼
극장에서의 쇼 공연이 활발해지면서 유명 스타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경쟁 또한 치열해졌다. 서울의 경우 남대문의 자유극장, 청량리의 오스카 극장, 영등포의 연흥극장, 종로4가의 한일극장, 청계천의 천일극장과 바다극장 등이 쇼 공연의 메카로 소문이 났다. 그러다 보니 유명 스타들의 겹치기 출연이 성행했는데…. ‘인기 스타’가 제 시각에 안 나타나면 난리가 났다.-여러분, 하늘과 땅 사이에 뭐가 있는 줄 아세요? 예? 뭐라고요? 공기가 있다구요? 틀렸습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는 ‘과’자가 있습니다. 우습지 않으세요?-야, 사회자, 집어치워
스카라 극장 인근의 다방에서 ‘럭키 송’에게 무용수로 깜짝 발탁된 김미성(김미숙)은, 유명 연예인들이 포진한 공연단에 가담하여 순회공연에 나선다. 그런데 공연단이 이용하는 교통편에서부터 인기의 등급이 확연히 드러난다.“멀리 부산 공연을 간다 치면 특별 게스트인 트위스트 김, 문희, 윤정희 이런 사람들은 그 시절에도 비행기를 타고 이동했어요. 박재란 같은 유명가수는 평소에 여기저기서 개인 리사이틀을 개최하기 때문에 고급 자가용을 타고 다니고요. 우리 같은 무용수나, 이름 없는 만담꾼이나, 악단의 연주자들은 물론 버스를 타고 가지요.
석 달 동안 쇼단 전속 가수의 쓴맛을 보았던 김미성이 이번에는 서울의 스카라 극장 앞에 나타났다. 당시에는 쇼 공연단뿐만 아니라 영화를 만드는 영화사들도 사무실 한 칸 없이, 충무로 일대의 다방에 모여서 배우들과 출연 계약을 하고 스태프를 구성하고 물주를 구하고 하던 시절이었다. 김미성이 조심스레 다방 문을 밀고 들어선다.‘그 악단장하고 무용단장이 찾어오라는 다방이 여그가 틀림없는디….’널따란 다방은 거의 빈자리가 없을 정도였고, 군데군데 빵모자를 쓴 ‘예술가 모습’의 남자들도 눈에 띄었다. 다탁을 중심으로 여기저기 무리 지어 앉아
1959년 여름, 충청도 서산의 한 극장으로 사람들이 몰려든다. 이윽고 극장 입구에서 선전에 열을 올리던 악단의 연주자들도 공연준비를 위해 극장 안으로 들어간다. 공연이 시작되었다. 사회를 보는 남자가 무대 중앙에 등장하더니, 다분히 신파조의 억양으로 공연 시작을 알린다.-문화와 예술을 사랑하시는 서산 군민 여러분, 오랫동안 기다리셨습니다. 지금부터 그 이름도 유명한 우리 삼천리 쇼단의 버라이어티쇼, 그 장엄한 막을 올리겠습니다!팡파르가 울리고 객석에서 박수가 터진다. 그 시절 전국의 극장에서 성행했던 그 ‘쇼’라는 이름의 공연은
1959년의 어느 봄날, 서울 홍제동의 주택가 골목으로 한 소녀가 들어서더니 여긴가 저긴가 연신 사위를 두리번거린다. 등에는 세 살쯤 돼 보이는 아이를 업었다.-요상한 일이구먼. 화살표에는 분멩히 이쪽으로 가라고 돼 있었는디….골목길에서 다시 갈라진 작은 골목들을 두세 번 더 드나들더니, 드디어 어느 가정집 대문 앞에 선다. 소녀가 이마의 땀을 훔치고 심호흡을 하더니 이윽고 대문을 밀고 들어선다.-누군가? 아니, 웬 아가씨가…처녀 같은데 애는 들쳐 업고서….오십 줄의 주인 남자가 소녀의 행색을 잠시 훑어보며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2003년 6월 어느 날에 김미성 가수를 만났다. 나는 우선 약속 장소에 나타난 그의 차림새에 조금 놀랐다. 환갑이 넘은 나이(61세)였음에도 노출이 과하다 싶은 민소매 가죽 자켓에다 허옇게 닳은 청바지를 받쳐 입었다. 허리에는 옛 서부영화에 나오는 배우들이나 착용했음 직한 요란한 장식이 달린 가죽 벨트를 둘렀다. 누가 봐도 ‘무대의상’이었는데, 그는 평상복 차림이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역시 ‘연예인’이었다. 그가 내게 물었다.“대중가요 좋아하세요? 제 노래 중에서 혹시 아는 노래가…”“물론 있지요. ‘꽃길 따라 걷던 길에 비
1960년대 말쯤, 시골의 어느 남자 중학교 교실의 점심시간 풍경을 구경해보자.-에, 그러면, 20일 동안의 동남아 순회공연을 마치고 김포공항을 통해 어제 막 귀국한 대한민국 최고의 명카수 김달수의 노래가 있겠습니다!자칭 오락부장이 책받침을 동그랗게 말아서 마이크 삼아 들고는 호들갑을 떤다. 학생들은 손뼉을 치거나, 도시락 뚜껑을 두드리거나. 혹은 휘파람을 불면서 환호한다, 김달수가 책받침 마이크를 건네받고는 큼큼, 목청을 다듬더니 한껏 감정에 겨운 목소리로 노래를 시작한다.-‘삼각지 로타리엔 궂은비는 오는데 / 잃어버린 그 사람을
남산 식물원 아래쪽에는 자그마한 규모의 동물원이 있었다. 남산공원 관계자들은 이 동물원을 소동물원(小動物園)이라 불렀다. 그 호칭이 굳어져서 ‘남산 소동물원’이 공식 명칭이 됐는데, 아마도 서울에 있었던 큰 동물원(창경원)을 의식하고 붙인 이름이 아니었을까?“식물원을 개관하고 나서 3년여가 지난 1971년에 문을 열었는데, 처음엔 30여 종 230여 마리쯤 됐을 거예요. 그 중엔 꽃사슴이나 원숭이 같은 동물들도 있었으나, 원앙이나 공작 등 새 종류가 많았어요. 부모가 아이들 데리고 오거나 혹은 단체로 소풍 온 아이들이 식물원을 관람
남산공원의 여러 시설 중에서 일요일이 되면 새벽부터 장사진을 이루는 곳이 있었다. 시립 남산도서관이었다. 일요일마다 늘 그랬던 것은 아니고, 주로 중고등학생들의 시험 기간이 낀 일요일이면 예외 없이 열람석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했다.학생들은 도서관에 가서 무슨 특별한 자료를 열람하거나, 책을 대출받아 읽는 경우는 드물었다. 고등학생들의 책가방에는 교과서와 노트, 혹은 나 따위의 참고서가 들어 있었다. 그들은 ‘도서’가 필요해서 도서관에 간 것이 아니었다. 다만 앉을 ‘자리’가 필요해서 몰려
가족 단위로 공원에 올라 식물원을 관람하고, 연인끼리 케이블카에 올라타 공중을 나는 짜릿한 체험을 하고, 친구와 전망대에 올라 시가지를 조망하고…. 하지만 남산이 늘 그렇게 건전한 휴식처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자, 서울 시내 야경 관광할 사람 버스에 타세요! 두 사람만 더 타면 떠납니다! 기가 막힌 서울 밤 풍경 구경 갈 사람 얼른 타세요! 에이, 그냥 출발해야겠다. 자, 출발합시다, 오라이!초저녁, 화신백화점 앞 등의 종로통이나 광화문 부근에서는 서울의 밤 풍경을 구경시켜준다는 관광회사의 버스들이 진을 치고 있었는데, 이곳저
남산의 ‘서울타워’에 오른 사람들에게는 일절 사진을 찍지 못하도록 통제했는데, 전망대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도 마찬가지였다. 팔각정 부근에서도, 주요 건물이나 특히 청와대가 내려다보인다 해서, 시내 쪽을 향해서는 카메라 셔터를 누르지 못하게 막아섰다.-여기는 통제구역이니까 저 아래 분수대 쪽에 내려가서 실컷 찍으세요!경비원이 카메라를 가리면서 ‘사진 찍으려면 분수대 쪽으로 가보라’며 돌려세우는데, 그렇지 않아도 식물원 앞 분수대는 관광객들에게 사진 촬영지로 이미 각광을 받고 있었다.“분수대 앞 광장에 가면요, 공원관리소로부터
1961년 9월, 남산 팔각정에서 케이블카 설치를 위한 기공식이 열렸다. 그리고 이듬해인 1962년 4월에 운행을 시작했다. 서울에서는 케이블카가 이때 처음 선을 보인 것이다.케이블카의 시내 쪽 승강장은 중구 회현동 산1번지, 지금의 숭의여대 옆이다. 거기서부터 팔각정 인근의 도착지점까지는 600여 미터에 불과했기 때문에, 탑승 시간이라야 겨우 3분 남짓이었다. 조금 과장해서 표현하면 ‘탔다 하면 내릴’ 준비를 해야 할 만큼 잠깐이었는데, 그럼에도 그 짧은 경험을 하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의 행렬이 승강장 매표소 앞에 길게 이어졌다.
남산 순환로에서 정상의 팔각정에 오르는 길이 포장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고, 1970년대엔 그냥 흙바닥 길이었다. 평일에도 많은 사람이 남산을 찾았지만, 주말이 되면 몰려드는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고 최상인 남산식물원 원장은 회고한다.“그 시절에는 입장료가 있었어요. 국민학생 이하의 소인은 100원, 중고생은 200원, 성인은 300원씩 받았지요. 사실 시민들의 세금으로 공원을 운영하고 개방한 것인데 입장료를 따로 받아서는 안 되는 거였어요. 당시 남산에 찾아온 사람들은 대부분은 정상까지 올라갔다 와야 직성이 풀린다고 생각했는